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
12·3 비상계엄을 발표한 대통령이 내란의 우두머리로 구속되었다. 그럼에도 반헌법적인 계엄을 슬쩍 눈감고 그것이 '비상조치'였다고 아직도 우기는 자들이 있다. 말의 파탄이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1호는 국회의 정치활동을 금한다고 했다. 헌법을 위배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문장이다. 이를 떡하니 발표해 놓고 과거의 포고령을 잘못 베껴 썼다고 강변한다. 말의 어이없음이다. 모두 6개의 항목으로 된 포고령에는 '금한다'는 서술어가 4번 등장한다. 말의 폭력이다.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는 제6항은 주술 관계가 불분명한 수준 이하의 악문이다. 평소에 책을 읽지 않은 자들이 작성한 게 틀림없다. 이들은 금하고, 조치하고, 처단하는 것밖에 모른다.
권선희 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을 읽으며 우리의 입에서 빠져나오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구룡포를 중심으로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선량한 초동급부(樵童汲婦)들이다. '폭력으로 좀 살고 나온 아들'과 횟집을 차린 어미도 있고, 어린 딸에게 짜장면 한 그릇 시켜 먹여주는 팔 하나 없는 아버지도 있다. 시인은 이들의 기구한 삶과 생활의 궁핍을 주목하지 않고 이들의 입을 통해 나온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들은 가진 것 없어도 당당하고, 가방 끈 짧아도 자신감으로 넘친다. 시인은 이들의 말들을 어떻게 시어로 기록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죽변 효자」라는 시는 아버지가 드나드는 다방의 김양에게 던지는 말로 구성이 되어 있다. 뱃일도 접고 '할마시까지 갖다 묻고 적막강산 같은 집구석에 죙일 들앉아' 있는 아버지 말이다. 화자는 김양에게 "손도 쪼매 잡혀주고, 궁디도 슬쩍 들이대고, 한번씩 오빠야, 라고도 불러주그라"라고 부탁하는 아들이다. 노소의 윤리가 뭉개지고 형식적인 체면치레마저 사라지면서 얻게 되는 이 무한한 평화를 뭐라 이름 붙여야 할까. 「첫눈」이라는 시에는 '목욕탕 구석 장판 깔린 간이침대가 일터인' 여자가 주인공이다. '젖은 팬티 젖은 브래지어가 유니폼'인 환갑 넘은 그 여자의 이름은 화자인데, 날 때부터 등에 '둥근 무덤 짊어진' 장애가 있는 세신사다. 그가 속옷을 건조대에 널며 창밖을 보며 하는 말이 기가 막히다. "언니야, 첫눈 온다."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에 등장하는 인물 군상들이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래전 민중시에 자주 나타나던 가난한 민중들을 기억한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던 그 민중 말이다. 그런데 권선희의 시에 나오는 인물들은 민중시의 인물들과 확연하게 다르다. 이들은 현실에 대한 분노가 없고 타자에 대한 증오가 없으며 미래에 도래할 어떤 희망을 위해 집단적으로 연대하거나 무엇을 조직하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가 쓸데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언어들을 구사하며 그냥, 그대로, 바닷가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그동안 구사한 말은 대상을 낮추거나 무시하는 언어였다. 상대를 깎아내려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던 가식의 언어였다. 우리의 뻔뻔함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세상에 까발려졌다. 권선희 시인은 "바닷가 부족이 입을 달아주었다. 그 입으로 노래했다"고 서문에 밝혔다. 시인은 자신이 눈여겨본 부족의 언어를 기록했을 뿐, 그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간섭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인이 쓰다 달다 말하지 않은 덕분에 그의 시를 읽는 우리만 복 터졌다. 말로써 아름다움이라는 체제를 전복하는 이 시집을 선량한 국민들에게 권한다.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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