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은경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
사실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항상 최고의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옳다고 선택한 결과가 나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서사다. 실패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어쩌랴. 실패를 통해 우리는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우리의 미래는 과거보다 앞으로 나갈 테니. 그 바탕에 '신뢰'가 있다. 나와 나의 이웃, 그리고 우리 사회에 대한 신뢰다.
홍해가 갈라지듯 쩍 벌어진 저 광장을 보면서 생각한다. 우리는 지난 12월3일 그 전의 날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신뢰는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파란불이 들어와 길을 건널 때 우리는 달리는 차들이 멈춰 선다는 믿음이 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먹어도 되는지 일일이 성분 검사를 하지 않는다. 먹을 수 있는 것을 판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쓸 땐 마주 앉은 사람이 계약 내용을 지킬 것이라 믿고 서명을 한다. 행여 계약 내용을 지키지 않아 피해를 입더라도 법이 나의 부당한 손해를 구제해 줄 것이라 믿는다. 신뢰가 형성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고 이는 협력을 촉진한다. 이것이 사회 전체의 안전망이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가 복지국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낸 세금이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돌아온다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뢰가 없다면 속지 않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써야 한다. 국가가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으로 남아프리카의 일부 국가에서는 경찰보다 개인 경비 용역업에 고용된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법과 제도가 아무리 정교하게 갖춰져 있다고 해도 이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신뢰가 없다면 그 사회의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신뢰가 낮으면 감시와 통제에 대한 비용과 사회 갈등 비용이 증가하고 사회적 피로도는 높아진다.
2025년 에델만 신뢰도 지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신뢰 지수는 41점으로 나타났다. 51점 미만은 '불신'을 의미한다. 조사 대상 28개국 중 27위다. 정부 지도층, 기업 지도층, 기자 및 언론 관계자에 대한 불신은 특히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두려운 사실은 신뢰가 무너진 자리를 분노가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를 적으로 상정하고 타협하지 않고 제압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온라인 공격 허위 정보 유포, 폭력 행사, 공공 및 사유재산 훼손과 같은 적대적 행동을 변화의 수단으로 인정한다고 응답했다.
12·3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와 '법치'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부정선거를 말하고, 법원의 판결조차 믿지 않는다. 향후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이어질 이후의 과정에서 이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헌재의 결정이 내 생각과 달라도 수용하겠다는 사람은 39.9%, 둘 중 하나도 되지 않았다.
온 나라가 며칠 새 산불의 화마에 폐허가 되고 있다. 무너진 이 땅 위에 우리가 새롭게 세워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이은경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이은경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