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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
점심시간. 아주 잠깐이라도 봄을 보여주고 싶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꽃구경'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침산공원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따라나선 동료는, 벚꽃 계단 앞에 이르자 활짝 웃었다. 잠시 동료의 얼굴을 스치고 간 봄기운이, 그렇게 환한 표정을 끌어낼 줄은 미처 몰랐다.
꽃잎이 흩날리는 봄의 길목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침산공원을 처음 찾은 동료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연인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사진 구도를 찾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한껏 부푼 표정이다. 상춘객들의 얼굴에도 벚꽃 같은 하얀 설렘이 가득했다. 덧없이 흐르는 계절 속, 벚꽃 계단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여유'였다.
그 여유를 품은 시간은, 가늠할 수 없는 계단 끝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렇게 다다른 정상, 침산정(砧山亭)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크고 웅장했다. 조선 초기 대문장가 서거정의 흔적이 서린 곳이다. 그의 연작시 '대구십영(大丘十詠)' 중 '침산만조(砧山晩照)'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여섯 임금을 섬기며, 법전·역사·지리·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맹활약한 인물이다.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등 수많은 기록물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건, 풍경과 시를 아꼈던 그의 마음이다. 본관인 대구의 자연을 시로 남기고, 말년에는 서울 사가정(四佳亭)에 머물며 학문과 자연을 벗 삼았다. 그가 삶의 아름다움이라 여긴 '책, 경치, 시, 벗'의 철학은 오늘날 '사가정'과 '사가정역'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그가 침산정에서 바라본 풍경은, '침산만조'에 깊고 섬세하게 담겨 있다.
水自西流山盡頭 물은 서쪽으로 흘러 산머리에 이르고/砧巒蒼翠屬淸秋 침산 푸르러 맑은 가을빛 띠고 있네/晩風何處?聲急 저녁 바람 어디에서 방아소리 급한고/一任斜陽搗客愁 저물녘 나그네 시름 저 방아로 찧어 볼까
시에 담긴 방아 찧는 소리와 저녁 바람의 풍경은, 지금의 침산이 품고 있는 고요함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비록 시가 그려낸 건 가을 저녁의 풍경이지만, 그 고요함은 오늘 벚꽃 아래에서도 낯설지 않다. 계절이 다르고 시대는 흘렀지만,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힘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망치산' '수구막이산'이라 불리던 옛 이름을 간직한 침산. 이제 매년 봄, 벚꽃이 흐드러진 공원으로 변모해 도시인들의 쉼터가 되었다. 입소문을 한껏 탄 '벚꽃 계단'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순간으로 회자되고 있다.
덧없이 흐르는 계절. 벚꽃 계단을 타고 침산정에 한 번쯤 올라보시라. 그리고 봄날에 누리는 가장 소박한 '여유'를 만끽해 보시길. 벚꽃은 해마다 피고 지고, 다시 핀다. 오늘 우리의 미소는 어쩌면 그 봄날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해마다 이 봄날의 미소를 이어갈 것이다. 침산정에서 '서거정의 노을'과 마주칠 절정의 순간 또한 기대해 본다.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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