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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지대] 봄날, 徐居正(서거정)을 만나다

2025-04-14
[단상지대] 봄날, 徐居正(서거정)을 만나다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출근길. 차량 행렬이 숨을 고르듯 멈춰 있다. 라디오에서 봄의 시작을 알리는 국민 가요, '벚꽃엔딩'이 흘러나왔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 문을 열고, 창문을 열어 밤새 머물던 공기를 털어냈다. 커피메이커에 원두와 물을 채웠다.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커피 향이 서서히 공간을 채워갔다. 그 향을 따라 동료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피곤이 얼굴에 묻어 있었지만, 갓 내린 커피를 받아 들고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우린 올해도 꽃구경 한 번 못 하고 3월을 보내네요" 며칠째 계속된 야근의 여운이 담긴 말이다.

점심시간. 아주 잠깐이라도 봄을 보여주고 싶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꽃구경'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침산공원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따라나선 동료는, 벚꽃 계단 앞에 이르자 활짝 웃었다. 잠시 동료의 얼굴을 스치고 간 봄기운이, 그렇게 환한 표정을 끌어낼 줄은 미처 몰랐다.

꽃잎이 흩날리는 봄의 길목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침산공원을 처음 찾은 동료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연인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사진 구도를 찾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한껏 부푼 표정이다. 상춘객들의 얼굴에도 벚꽃 같은 하얀 설렘이 가득했다. 덧없이 흐르는 계절 속, 벚꽃 계단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여유'였다.

그 여유를 품은 시간은, 가늠할 수 없는 계단 끝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렇게 다다른 정상, 침산정(砧山亭)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크고 웅장했다. 조선 초기 대문장가 서거정의 흔적이 서린 곳이다. 그의 연작시 '대구십영(大丘十詠)' 중 '침산만조(砧山晩照)'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여섯 임금을 섬기며, 법전·역사·지리·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맹활약한 인물이다.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등 수많은 기록물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건, 풍경과 시를 아꼈던 그의 마음이다. 본관인 대구의 자연을 시로 남기고, 말년에는 서울 사가정(四佳亭)에 머물며 학문과 자연을 벗 삼았다. 그가 삶의 아름다움이라 여긴 '책, 경치, 시, 벗'의 철학은 오늘날 '사가정'과 '사가정역'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그가 침산정에서 바라본 풍경은, '침산만조'에 깊고 섬세하게 담겨 있다.

水自西流山盡頭 물은 서쪽으로 흘러 산머리에 이르고/砧巒蒼翠屬淸秋 침산 푸르러 맑은 가을빛 띠고 있네/晩風何處?聲急 저녁 바람 어디에서 방아소리 급한고/一任斜陽搗客愁 저물녘 나그네 시름 저 방아로 찧어 볼까

시에 담긴 방아 찧는 소리와 저녁 바람의 풍경은, 지금의 침산이 품고 있는 고요함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비록 시가 그려낸 건 가을 저녁의 풍경이지만, 그 고요함은 오늘 벚꽃 아래에서도 낯설지 않다. 계절이 다르고 시대는 흘렀지만,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힘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망치산' '수구막이산'이라 불리던 옛 이름을 간직한 침산. 이제 매년 봄, 벚꽃이 흐드러진 공원으로 변모해 도시인들의 쉼터가 되었다. 입소문을 한껏 탄 '벚꽃 계단'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순간으로 회자되고 있다.

덧없이 흐르는 계절. 벚꽃 계단을 타고 침산정에 한 번쯤 올라보시라. 그리고 봄날에 누리는 가장 소박한 '여유'를 만끽해 보시길. 벚꽃은 해마다 피고 지고, 다시 핀다. 오늘 우리의 미소는 어쩌면 그 봄날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해마다 이 봄날의 미소를 이어갈 것이다. 침산정에서 '서거정의 노을'과 마주칠 절정의 순간 또한 기대해 본다.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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