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부터 노동자·농민 편에서 독립운동
대구지역 각 노동단체 설립 주도
대구에선 전혀 찾을 수 없는 그의 흔적
“수십년간 항일운동한 공로 기억돼야”
![[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4] 이념·진영 넘나들며 활동한 ‘통합의 아이콘’ 정운해 선생](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04/news-p.v1.20250416.49640e78379542898fc0155f6baf851a_P1.jpg)
정운해 지사. 출처:공훈전사사료관
![[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4] 이념·진영 넘나들며 활동한 ‘통합의 아이콘’ 정운해 선생](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04/news-p.v1.20250416.7c6f98151e5a4aeb8d0c603229e10621_P1.jpg)
192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정운해 지사. 출처:공훈전사사료관
![[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4] 이념·진영 넘나들며 활동한 ‘통합의 아이콘’ 정운해 선생](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04/news-p.v1.20250417.8e98a77074594e9ba590c28fd21830d9_P1.jpg)
정운해 선생의 묘소
15일 방문한 대구 수성구 이천동 정운해 선생의 묘소.
![[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4] 이념·진영 넘나들며 활동한 ‘통합의 아이콘’ 정운해 선생](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04/news-p.v1.20250417.2231caaa6ba448c3a0a2b330cb499a7e_P1.jpg)
정운해 선생의 출생지
15일 방문한 대구 중구 서성로2가 49번지. 정운해 선생의 출생지인 이 일대는 재개발 구역에 묶여 진입이 불가능했다.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을 맞아 영남일보가 4월에 소개할 인물은 대구에서 “민중 해방"을 외치며 항일운동 중심에 섰던 정운해 지사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회운동'을 통해 일제에 맞섰지만, 국가독립을 위해 이념 진영을 넘나들며 활동한 '통합의 아이콘'으로 인식되는 인물이다.
◆ 교사에서 '민중의 해방' 외친 독립운동가로
1893년 9월14일, 정운해는 대구시 중구 서성로2가에서 태어났다. 협성학교를 졸업한 뒤 달성 산격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하지만, 그는 국권이 무너진 상황에서 교단에 있는 것만이 시대적 사명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 여러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에는 중국 지린성에서 독립자금 마련 운동을 위한 '길림군정사' 결성에 참여, 선전 겸 연락업무를 맡았다.
1919년 3·1만세운동 후엔 국내 자금 모집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대구로 왔다. 독립운동 비밀결사단 '달성친목회'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항일 조직망을 확장하며 자금 모집 활동을 했다. 그러다 달성친목회 활동이 발각되자 서울로 피신했다.
이 시기에 그는 무장투쟁을 넘어선 '민중' 기반의 항일전략을 고민했다. 이때부터 '노동자' '농민'과 함께 사회활동 최전선에 섰다. 당시 “민족의 독립과 민중 해방은 맞닿아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20년엔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연구모임을 조직했다. 전국노농운동조직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에 참여했고, 이후 대구지회를 창립하는데 일조했다
1922년 9월 일본 니가타현에서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두말없이 일본으로 넘어가 사건을 조사했다. 조사 착수 2개월 만에 '재일본 노동자의 상황'이라는 제목의 조사 결과를 '시민공론(잡지)'에 실었다. 한국에 곧바로 돌아오지 않고, 오사카에서 조선노동자동맹 창립대회와 사상단체 북성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3년부턴 농민운동에 본격 뛰어들었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의 정기총회를 열고 단체명을 '대구노동공제회'로 변경했다. 농민운동을 앞두고 선언서와 결의사항도 낭독했다.
1924년엔 진주에서 열린 '경남노농운동자간친회'를 주도했고, 이듬해 전국 농민운동의 구심체였던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이외에도 대구농촌사를 설립하고, 대구신문배달조합·대구재봉직공청년회 등 대구지역 각 노동단체 설립에 기여했다.
노동계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다가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하 조공) 결성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노농부 책임자로 선임돼 전국적인 조직활동을 벌였다.
![[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4] 이념·진영 넘나들며 활동한 ‘통합의 아이콘’ 정운해 선생](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04/news-p.v1.20250423.0b4eed7e734e439e8163ecfb5e3d71a7_P2.jpg)
조공은 일제에게 극도로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됐다. 이에 그는 일제를 피해 일본으로 탈출, 조공일본연락부에 가입했다. 하지만, 금세 체포됐다.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1931년 출소한 후 정운해는 연탄제조 사업에 종사하면서 생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꾸준히 항일운동 방향을 모색하며 노동자, 농민들과 접촉했다.
1944년 국내에선 해방 후 질서를 준비하기 위한 비밀결사체 '조선건국동맹'이 꾸려졌다. 이때 정운해는 건국동맹 경북 책임자로 선임돼 대구경북 각 지역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이미 쉰을 넘긴 나이였지만, 당시 '민족주의' 진영으로 통했던 경북치안유지회와 긴밀히 협력하며 광복을 준비했다.
하지만, 1945년 7월 일제 경찰에 다시 체포됐다. 대구형무소에서 미결수 신분으로 공판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경북 당국에서 고문 역할을 맡았다. 좌우진영을 아우르는 인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정운해는 1945년 10월 27일 사망했다. 사망 사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대구에서 찾을 수 없는 그의 이름…후손 “아무런 흔적 없어 안타까워"
정운해 지사의 손녀 정봉원(여·77)씨는 대구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후 이사해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
정씨는 영남일보와의 통화에서 “어릴 때부터 어머니 손에서 자라 할아버지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다. 할아버지는 활동을 하실 때도 혼자 숨어서 활동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무런 기록과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특히, 대구에서 평생 항일운동에 매진해왔는 데,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정운해 지사는 2005년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이전까지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90년 초부터 일제시대 농민운동을 조사한 김일수 경운대 교수가 각종 문헌을 뒤지던 중 정운해 지사의 행적을 발견했다. 오랜 연구 끝에 그 공로가 입증됐다.
정운해 지사가 활약했던 대구에는 그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동상·기념비 등은 물론, 이름조차 찾을 수도 없었다.
15일 방문한 중구 서성로2가 49번지.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정운해 지사가 태어난 생가다. 이 일대 전체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돼 진입조차 쉽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낡은 고택들이 방치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운해 지사가 잠시 미결수로 수감됐던 대구형무소 역사관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순 없었다.
대구에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을 찾은 곳은 수성구 이천동 인적이 드문 산지다. 우거진 소나무 사이에 한자로 '영일정씨 종산'이라 적힌 비석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보니 그는 가족들과 함께 묻혀 있었다. 그 곳에서 '정운해 선생의 묘'라고 적힌 비석을 찾았다.
김일수 교수는 “정운해 지사는 20대 때부터 50대까지 독립운동에 다양하게 참여했지만, 사상관련 운동가여서 지역사회에 깊이 조명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이어 “하지만 진영과 상관없이 당시 시대적 소명이었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두 진영의 연합을 모색했던 면은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후손들로부터 그는 마땅히 기억돼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선정 자문위원: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김일수 경운대 교수·강윤정 안동대 교수·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우대현 광복회 대구시지부장·변재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박영민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