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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추 거문고 이야기]<33>금은과 거문고 절개

2025-05-16 08:34

거문고 내려놓아 절개 지킨 조열…그 손자는 벼슬 내려놓고 절개 지켰다

[동추 거문고 이야기]<33>금은과 거문고 절개

어계고택(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의 재실인 원북재(院北齋). 이 고택은 조려가 태어나 자란 곳이고, 조열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후손들의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고려 말 조선 초에 살았던 선비 조열(趙悅)이라는 인물이 있다. 거문고를 잘 탔고, 또한 거문고를 매우 좋아했다. 거기에다 절개도 남달랐다. 그는 자신의 호를 '금은(琴隱)'이라 짓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가 1394년 11월 한양 천도 후 궁궐 낙성연을 열 때 친구였던 조열을 초청해 거문고를 타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한 일화가 유명하다.

고려 공민왕 때 공조전서를 지낸 조열은 거문고와 그림, 시에 능했다. 달밤에 거문고를 타면 그 소리가 몇 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조열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조순 장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공양왕에게 이성계 부자의 병권을 거둬 사직을 보전할 것을 3일에 걸쳐 상소했고, 열 차례나 얼굴을 대하고 간언했다. 그러나 공양왕이 차마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조열을 축출했다. 그러자 조열은 고향 함안으로 돌아가 군북면 명관리에서 지내다 원북마을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조선 영조에서 순조 시대에 걸쳐 활동했던 이채(李采·1745∼1820)가 쓴 '고려공조전서조공 묘갈명(高麗工曹典書趙公墓碣銘)'을 비롯해 맹사성(1360~1438)이 지은 만은(晩隱) 홍재의 행장, 허백당(虛白堂) 성현의 글 등에 조열의 행적이 전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거문고 연주 부탁하자

누추한 차림으로 찾아가 완곡히 거절

"뒷날 무슨 염치로 선왕 뵙겠습니까"

손자인 조려는 계유정난 이후 낙향

서산 아래 은거하며 낚시로 여생

단종에 충의 지킨 생육신으로 유명

◆태조 이성계의 궁궐 낙성연 거문고 연주 부탁 거절

조선 태조가 공양왕을 폐하여 간성(干城)에 봉군(封君)하자, 영남지방에 있던 조열은 이 소식을 듣고 천리 길을 머다 않고 간성까지 가서 왕을 뵙고 안부를 살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가 1394년 한양에 궁궐을 완공한 후, 조열이 거문고를 잘 타는 것을 알고 예를 갖춰 친서를 보내 11월 26일 낙성연에 초대했다.

조열은 사양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고 누추한 옷차림으로 궁정에 들어섰다. 태조가 반갑게 맞이하며 손을 잡고 "이번 기회에 옛 친구를 위하여 한번 재예(才藝)를 보여줄 수 없을까"라고 말했다. 조열은 "지난해 선왕(공민왕)의 연회에서도 타지 않았던 사실은 왕도 보았을 것인데, 만약 지금 왕의 청을 받아들인다면 뒷날 무슨 면목으로 선왕(先王)을 지하에서 뵙겠습니까"하고 거절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정종이 상왕(태조)의 초상화를 만들고자, 조열의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남을 듣고 친서로 그에게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공민왕의 초상도 그리지 않았는데 이 늙고 천한 몸이 어찌 감히 명을 받들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 이에 정종이 노하여 조열을 투옥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조가 바로 그를 석방하게 했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조열은 만은 홍재·모은(茅隱) 이오와 더불어 합천 삼가의 운구(雲衢)에 모여 서로 위로도 하고 시를 읊으며 노래 부르니, 사람들이 중국 상나라 기자(箕子)와 주나라 백이숙제의 절의와 같다고 하였다.

홍재의 행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날 밤 판서 성만용, 평리사 변빈, 박사 정몽주, 전서 김성목 등이 대사성 이색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논하였다. 이색이 이때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떠났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라고 말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홍재는 귀향하기로 마음먹고 합천 삼가 대평촌(大坪村)에 은거하기로 하고, 이곳을 '두심동(杜尋洞)'이라 칭했다. 이때 함안에 우거하고 있던 조열과 이오가 이곳을 서로 왕래하면서 시사(時事)를 걱정하였다. 고려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이 모여서 울며 비가(悲歌)를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맥수(麥秀)·채미(採薇)의 비가에 비유했다. 후인들이 그 의리를 흠모하여 운구서원(雲衢書院)을 지어 봉향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금은실기(琴隱實紀)'가 있다.

[동추 거문고 이야기]<33>금은과 거문고 절개

어계고택에 걸린 '금은유풍' 현판.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금은과 모은, 만은 세 인물은 '영남의 삼은(三隱)'으로 불리었는데, 위 글에서 '맥수'는 '맥수지탄(麥秀之歎:보리가 잘 자란 것을 탄식하다)'을 말한다. 국가가 멸망한 것을 한탄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과거의 영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초라한 현실을 바라보며 느끼는 비애와 한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고사성어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고대 중국의 삼대(하·상·주) 중 상나라(또는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은 비간과 같은 충신들을 멀리하고, 달기와 주지육림에 빠져 백성과 제후들의 마음을 잃었다. 결국 주왕은 주나라 무왕이 서쪽의 제후들을 규합해 쳐들어오자 패배하여, 도성에 불을 지른 뒤 자살했다. 상나라도 멸망했다.

주왕의 숙부인 기자는 평소에 덕이 있는 사람으로, 주왕의 폭정을 말리며 정사를 돌보라고 간곡히 충고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폭군의 노여움을 사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결국 몸을 멀리 피해 머리를 풀어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남의 집 종이 되어 숨어 살았다. 이후 주나라의 침공과 주왕의 죽음으로 멸망한 상나라에서 그가 우연히 상나라의 옛 도성을 지나가게 되었다. 옛 도성과 궁궐터가 폐허가 되어 그 자리에 보리만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을 보고 한탄스러워, 맥수지시(麥秀之詩)를 지어 읊으며 슬퍼했다.

그리고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지낸다는 의미로 절개를 표상하는 '채미(採薇)'는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상나라 말기·주나라 말기의 전설적 형제성인으로,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의인으로 유명하다. 백이와 숙제에 관한 이야기는 '사기'의 열전에 나온다. 본래는 상나라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다. 그 무렵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토멸하여 주왕조를 세웠다. 그러자 무왕의 행위가 인의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으며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어계고택 편액 '금은유풍'

금은 조열의 손자인 어계(漁溪) 조려(1420~1489)의 고택에 가면 '금은유풍(琴隱遺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금은 조열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다.

조열의 손자인 조려는 생육신으로 유명한 선비다. 조려는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 함안으로 내려와서 서산(西山) 아래에서 은거했다. 후세 사람들이 중국 은나라의 충신인 백이(伯夷)의 고사에서 따와, 함안의 서산을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불렀다. 조려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는데, 스스로 '어계처사(漁溪處士)'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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