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짙어지는 청송의 여름…인간은 오늘도 위로 받는다

주왕산 용추협곡. 197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주왕산은 청송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하고 있다. 2017년 청송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는데 청송의 지질명소 24곳 중 9곳이 주왕산에 있다.
청송하면 떠오르는 명산 '주왕산'
7월 접어들면서 싱싱한 기운 뽐내
푸른 하늘·바위봉우리의 조화 절경
주왕·절골계곡 청정 자연에 힐링
호수 속 왕버들 어우러진 '주산지'
작년부터 후계목 심어 경관 복원
주산지만의 신비로운 모습 눈길
아직 남은 산불 흔적 안타까워
청송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에게 '청송은 ( )'라고 적힌 쪽지를 주고 괄호를 채워보라고 한다면 대부분 '주왕산' 혹은 '사과'라고 대답할 것이다. 지금은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을지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30년 전이라면 단연코 '주왕산'이었을 것이다. '청송사과' 브랜드가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이전, 오랜 세월 동안 청송을 대표하는 브랜드는 '청송 주왕산'이었다.
청송군이 발간한 '국역 주왕산 유람록' 1·2권에는 여헌 장현광(1554~1637)부터 매창 박인조(1883~1952)까지 옛사람들이 주왕산을 둘러보고 남긴 글 40편이 실려 있다.
설악산, 월출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암산(巖山)으로 꼽히는 주왕산은 수많은 암봉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빚어내는 절경으로 1976년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2003년에는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이, 2013년에는 주산지 일원이 각각 국가유산인 명승으로 지정됐다.
한편 2017년에는 청송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는데, 청송의 지질명소 24곳 중 9곳(기암 단애, 주방천 페퍼라이트, 연화굴, 용추협곡, 용연폭포, 급수대 주상절리, 절골 협곡, 주산지, 노루용추 계곡)이 주왕산에 있다.
명승은 말 그대로 경관이 뛰어난 곳을 대상으로 국가유산청이 지정하는데 문화경관, 역사문화경관, 자연경관으로 분류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문화경관은 전통마을과 같이 인간의 활동과 자연환경이 상호작용한 곳이며, 역사문화경관은 고궁·성곽 등 역사적 의미를 지닌 문화유산이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는 곳이며, 자연경관은 인간의 간섭 없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은 문화경관으로, 주산지 일원은 자연경관으로 분류된다.

청송 주산지는 조선 경종 원년인 1721년 완공된 인공저수지다. 주산지에는 둥치가 뒤틀린 늙은 왕버들과 버팀목을 두른 왕버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명확한 경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특징이 그러하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주왕계곡은 절경과 더불어 중국 동진(東晋)의 왕족 주도(周鍍) 혹은 신라의 김주원과 관련된 주왕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주산지는 조선 경종 원년(1721)에 완공된 인공저수지이지만 호수 속의 왕버들과 안개, 단풍이 어우러지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비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게 분류됐을 것이다.
사실 경관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자연을 바라보는 존재로서 인간의 간섭이 전제돼 있다. 인류는 시선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해서도 신화와 전설이라는 형식으로 그 풍경을 상상해왔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장소는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인간이 자연을 만나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 읽어도 된다.

청송의 지질명소 중 한 곳인 주왕산 용연폭포. 주왕계곡의 바위봉우리들은 파란 하늘과 높이 떠 있는 구름을 배경으로 굳센 기상을 보여주는 듯 하다.
조선 선비들의 주왕산 유람록도 그들이 주왕산에 말을 건('이름을 불러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헌 장현광이 선조20년(1597년)에 쓴 '주왕산록(周王山錄)'에는 여러 바위의 다채롭고 기이한 형상을 부부, 원수, 사제 등 인간관계나 역사적 인물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고는 '바위 모양이 천만가지로 다른 것과 인간의 일이 천만가지로 변화하는 것이 모두 하나의 이치'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가 평소 고민해온 성리학적 주제를 주왕계곡의 바위들 앞에서 한번 정리를 해본 것이다.
하음 신집(1580~1639)의 '유주방산록(遊周房山錄)'은 주왕산의 봉우리, 바위, 암자, 못, 폭포 등의 모습과 특징을 하나하나 설명한 뒤에 "세상의 번잡한 일에 얽매여 선경에서 소요하면서 남은 생을 마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 선계와 속계가 한 번 단절되니 그리워하는 마음이 매우 깊었다"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사람이 잠시 자연과 함께하는 황홀한 경험을 할 수는 있지만 곧 속세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주왕산은 예나 지금이나 찾아오는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걸게 만드는 산이다. 하늘 높이 우뚝 속은 기암절벽과 바위를 깎으며 휘돌아 내려가는 계곡물은 우선 탄성을 지르게 하고, 거기에 어떤 숨겨진 의미가 숨어있다고 믿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주왕산과 주산지를 둘러보면서 겸손을 배우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고, 의지를 다지기도 한다. 이름을 불러주어도 산은 아무런 대답이 없지만, 그 순간 산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기억되는 것이다.

청송 주왕산 대전사. 이곳에서 용추폭포까지 2㎞ 구간은 휠체어·유모차로 이동이 가능한 무장애 탐방로로 조성돼 있다.
7월의 주왕산과 주산지는 싱싱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연화봉, 병풍바위, 급수대 등 주왕계곡의 바위봉우리들은 파란 하늘과 높이 떠 있는 구름을 배경으로 굳센 기상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일찍 찾아온 폭염 탓인지 탐방객은 많지 않다. 땀은 났으나 나무 그늘과 골바람 덕분에 그리 힘들지는 않다.
대전사에서 용추폭포까지 2㎞ 구간은 휠체어·유모차로 이동이 가능한 무장애 탐방로로 조성돼 있고, 맨발걷기 하는 사람들을 위한 세족장도 있다.
주산지와 가까운 절골계곡은 사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을 징검다리로 건너다니는 탐방로가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절골분소에서 대문다리까지 약 3.5㎞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을 즐기며 걷는 완만한 길이다. 대문다리를 지나면 계곡 길이 좀 더 이어지다 가메봉으로 가는 가파른 등산로가 시작된다.
주왕계곡이 웅장하고 강인한 느낌이라면 절골계곡은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이다. 탐방로도 주왕계곡은 계곡물을 내려다보며 걷도록 돼있지만 절골계곡은 계곡물과 함께 걷는다.
절골계곡은 매년 가을이면 탐방객 안전과 생태계 건강성 유지를 위해 탐방로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9월 중순부터 약 2달간 하루 1천350명까지 온라인으로 접수를 진행했으며 당일 정원 미달일 경우에는 현장접수를 받았다.
주산지에는 둥치가 뒤틀린 늙은 왕버들과 둥치 주변으로 버팀목을 두른 젊은 왕버들이 함께 서 있다. 밑둥치만 남은 죽은 나무도 수면 위로 드문드문 보인다. 주산지에는 10여 년 전만 해도 100살이 넘는 나무들이 많았으나 상당수가 명을 다했다. 지난해 가을 청송군은 주산지 왕버들 복원을 위해 수위를 낮추고 후계목을 심었다. 지금은 수위가 다시 높아져 나무들이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주왕계곡, 절골계곡, 주산지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어서 다행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다. 지난 봄 대형산불로 주왕산도 전체 면적의 약 3분의1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청송읍 월외탐방지원센터도 전소됐으며 금은광이삼거리, 장군봉으로 오르는 탐방로는 탐방객 안전을 위해 통제 중이다. 유례없는 이 산불의 불씨가 자연을 대하는 인간들의 오만에서 시작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송 주왕산의 높은 바위봉우리들은 하늘과 구름을 배경으로 굳센 기상을 보여준다. 사진은 주왕산 용추협곡.
오는 가을에도 주왕산 단풍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주왕산과 주산지 일원을 찾아올 것이다. 올해 탐방객들은 주왕산에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 여전히 자연은 일언반구 말이 없겠지만,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는 마음이 바위와 나무에도 전해지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위로를 전한 사람이 더 큰 위로를 받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국립공원공단 주왕산국립공원사무소가 운영하는 지역 연계형 생태관광 프로그램도 이와 같은 뜻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자연환경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프로그램에 산불피해 현장 방문과 함께 산불 피해지역 관광명소 방문, 식당 이용 등을 통해 지역사회 회복과 상생의 의미를 더했다.
주왕산국립공원사무소 김진재 자원보전과장은 "산불 이후 경북도와 청송군에서 관광객 유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탐방객이 크게 줄어들지는 않은 것 같다"면서 "지역 사회의 빠른 회복을 위해 많은 분들이 주왕산을 찾아주고 안전한 탐방을 위해 안전 수칙과 행동지침을 잘 따라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김광재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청송군>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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