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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 8. 포항과 해병대의 인연

2025-07-09 20:20

빨간 트레이닝복과 팔각모라는 자부심…포항은 100만 해병의 고향

6·25참전 美해병 포니 대령 떠나면서

포항 기지에 한국 해병대 배치 건의

1959년 1상륙사단 이전 포항시대 열려

현재 1사단 영내 4개여단과 직할부대

국군 지상전 부대 통틀어 최대 규모

복무 군인·가족 합치면 1만명 넘어

지역에 미치는 경제적인 효과도 커

66년 역사답게 '해병의 거리' 지금도 붐벼

여전히 주말과 휴일엔 외지인들 방문 꾸준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15일, 380명의 병력으로 시작됐다. 창설 1여년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해병대는 수많은 전투에 투입돼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무적해병', '귀신 잡는 해병'이란 찬란한 전통은 그때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선열의 호국의지 가슴에 안고/ 나라 위한 일편단심 영원하리라/ 영일만 아침해가 떠오를 때마다/ 겨레위한 용맹심 솟구쳐난다/ 아 아 해병해병 영원한 해병/ 우리는 무적의 팔각모 사나이/


국군의 선봉부대 해병 1사단' 해병 1사단가다. 해병대 제1사단이 포항에 뿌리를 내린 지 66년이 됐다.


포항 송도동에 위치한 미 해병 제1비행단 전몰용사 충령비. 1952년 당시 미국통역관으로 일하던 이종만씨가 포항역 앞에 미 해병대 제1전투비행단 전몰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이후 현재 자리한 송도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포항 송도동에 위치한 미 해병 제1비행단 전몰용사 충령비. 1952년 당시 미국통역관으로 일하던 이종만씨가 포항역 앞에 미 해병대 제1전투비행단 전몰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이후 현재 자리한 송도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병대와 포항의 인연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미 해병대 제1전투비행단 소속 제12·제33 비행전대가 포항비행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포항비행장을 방호하고 전쟁고아들을 위한 선린애육원 설립을 위해 애썼으며, 낙동강 방어선의 아군을 근접지원 했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돼 유엔군을 지원했고, 서울을 수복할 때도, 흥남철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들이 있었다.


미 해병대 제1비행단이 포항에 주둔한 지 1년여가 지난 1952년 8월 한국 해병대 1개 중대가 포항비행장 외곽 경계를 지원하기 위해 합류했다. 이것이 포항과 해병대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미군통역관으로 근무한 이종만씨는 1952년 12월22일 포항역 앞에 미 해병대 제1전투비행단 전몰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충령비를 세웠다. 현재 비석은 포항 송도동에 자리하며 매년 6월6일 현충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 해병은 4천267명, 부상자는 2만3천744명에 이른다.


1953년 7월27일 남북 휴전협정이 이뤄지자 해병대 제1전투단은 수도권 방어 임무를 위해 경기도 파주군 금촌면에 본부를 설치했다. 1954년 2월1일에는 제1전투단을 기반으로 해병 제1여단이 창설됐으며 3월17일 미 해병대 제1사단이 본국으로 철수함에 따라 작전권을 환수했다. 이러한 전력을 바탕으로 1955년 1월15일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 제1상륙사단이 창설됐다.


그 즈음 포항에 주둔해 있던 미 해병대가 철수하면서 부대재배치가 대두됐다. 당시 해병대사령부 수석고문이던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은 활주로 방어 및 전략기동부대로서 한국 해병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나 미 해병대가 주둔하던 포항기지를 한국 해병대가 인수해 '혈맹'을 이어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포항은 비행장과 철도, 항만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상륙작전부대가 언제든 출동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당시 포항비행장 활주로 주변은 청포도 밭이었고 여러 부대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고 한다. 결국 1959년 3월28일 해병대 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전, 본격적인 해병대 포항시대가 시작됐다.


포항 남구 해병의 거리. 각종 음식점부터 이용원과 마크사 등 해병과 관련된 가게가 빼곡히 들어서있다. 호황기였던 1980~1990년대에는 평일 저녁에도 식당에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해병의 거리를 품은 포항은 100만 예비역 해병의 또다른 고향이며 추억이 살아있는 장소다.

포항 남구 해병의 거리. 각종 음식점부터 이용원과 마크사 등 해병과 관련된 가게가 빼곡히 들어서있다. 호황기였던 1980~1990년대에는 평일 저녁에도 식당에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해병의 거리를 품은 포항은 100만 예비역 해병의 또다른 고향이며 추억이 살아있는 장소다.

◆무적 해병의 요람


1969년 포항지역 통합방위작전 수행을 위해 포항특정경비지역사령부(포특사)가 창설됐다. 이는 산업발전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포항제철소 등 포항지역의 국가 중요시설을 방호하기 위해 포항을 '특정경비지역'으로 분류하고 사태가 일어나면 군 주도의 조치로 조기에 지역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제도로, 일찍이 포항시와 해병대가 역사를 함께 했음을 의미한다.


1977년에는 고유의 양성교육을 계승하고 최강 해병대원을 자체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제2해병훈련단을 창설했다. 이어 1986년에는 해군 6항공전단, 1994년에는 상륙지원단, 1996년에는 제2해병훈련단이 모든 해병대 장병들을 양성하는 해병대 교육훈련단으로 개편됐다.


2016년에는 3천명 규모의 신속기동연대를 창설했고 2018년에는 해병대 상륙기동헬기 마린온 1호기를 전력화하면서 해상, 공중, 지상이 하나 돼 움직이는 '공지기동(空地機動)해병대' 건설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2019년에는 각 연대를 여단으로 개편하며 입체고속상륙작전, 신속대응작전, 전략도서 방어 등 다양한 작전 환경에서 독자적인 임무수행이 가능한 부대 구조로 개선했다.


지난해에는 국방혁신 4.0 추진에 발맞춰 미래 전장에 대비한 '아이언 마린(Iron Marine)' 전투실험대대를 출범시키고 상륙작전 수행능력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해병부대는 남구 오천읍과 동해면, 청림동에 걸쳐 넓게 자리한다. 해병대 제1사단 영내에 해병대 교육훈련단과 해병대 군수지원단, 해병대 항공단 등 4개 여단과 직할부대가 모두 함께 위치해 있어 규모가 상당하다. 이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상전 부대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다. 1개 사단의 구성부대가 한 장소에 모두 집결돼 즉각 출동이 가능한 부대는 포항에 주둔한 해병대 제1사단이 유일하다.


부대 안에 위치한 해병대 포항역사관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 배경과 해병대 제1사단의 역사,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의 활약상, 해병대 제1사단의 성공적인 작전 사례 등 해병대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야외 전시장에는 2018년 7월17일 마린온 헬기 시험비행 중 추락사고로 순직한 5명의 영웅을 기리는 '마린온 순직자 위령탑'이 있으다. 야외 무기전시장에는 한국전쟁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차, 에어보트, 스파이크 유도탄, 기념석 등이 전시돼 있다. 매년 4월 해병대문화축제가 열릴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해병대 교육훈련단(교훈단) 입구에는 '해병대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라는 문구가 문보다 더 크게 적혀 있다. 이 문으로 매월 1개 기수, 1천여 명의 장정이 교훈단에 입영한다. 매월 마지막 월요일이면 포항 해병대 교훈단 인근 도로는 입대자와 가족이 타고 온 차량으로 거대한 주차장이 된다.


이들이 포항지역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 해병대는 1959년 포항에 주둔을 시작한 후 연간 2만 명이 넘는 해병대원들을 양성해왔다. 포항 해병대는 복무 중인 군인과 가족을 합치면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생활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해병대의 요람이다.


포항 해병의 거리.  해병대의 '빨간 추리닝'을 사고 이름을 새기기 위해 마크사를 방문하는 이들이 여전히 이곳을 찾는다.

포항 해병의 거리. 해병대의 '빨간 추리닝'을 사고 이름을 새기기 위해 마크사를 방문하는 이들이 여전히 이곳을 찾는다.

◆해병의 거리


해병부대 서편의 도로는 해병로(海兵路)다. 포항 오천을 가로질러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냉천을 따라 포항시 남구 청림동에서 오천읍 문덕리를 연결하는 도로로, 2009년 해병대 1사단 창설 50주년을 맞아 해병로로 명명됐다. 해병로는 봄마다 벚꽃과 개나리가 터널을 이루는 포항의 이름난 봄꽃 명소이기도 하다.


해병로에서 충무로를 따라 들어가면 해병대 정문인 서문이 있다. 서문 앞은 '해병의 거리'다. 예전에는 서문사거리라고 불렀고 오천의 심장이라고 했다. 각종 가게로 빼곡한 거리 곳곳에서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한다', '귀신 잡는 해병대 무적해병' 등 자부심 넘치는 조형물들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해병대 교훈단의 문이 따로 없었다. 때문에 30년간 한 달에 1, 2기씩 선발하는 신병의 입소식 날이면 입영 장정과 가족 수천여 명이 서문을 드나들었다. 그때부터 서문은 '무적해병'이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됐다. 이렇듯 외부인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서문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됐다.


여기에 주말과 휴일이면 현역병과 직업군인이 무리 지어 쏟아져 나오면서 인근의 각종 상가는 문전성시를, 가게들은 밤늦도록 불야성을 이뤘다. 서문이 호황기를 이뤘던 1980∼1990년대에는 평일 저녁에도 가게에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해병의 거리'는 2000년대에 들어 쇠퇴기를 맞았다. 2007년 7월 해병대 교훈단이 정문을 개방하면서 더 이상 서문을 통해 신병이 입소하는 일이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빨간 트레이닝복을 사고 이름을 새기기 위해 마크사를 방문하는 배 나온 아저씨들이 '해병의 거리'를 걷는다. 맛집으로 이름난 식당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 외지인의 방문은 꾸준하다. 해병대 돌격머리를 만들어주는 이용원도 많이 보인다.


교훈단 입구 앞에는 일월문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그늘 막 쉼터와 정자, 해병광장 등이 마련돼 있어 매달 교훈단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공간이 돼 준다. 무엇보다도 공원은 연오랑 세오녀 전승의 뿌리이자 포항 호국 정신의 원류를 기저에 둔 유적의 복원이자 민족정기의 회복이라는 의미가 있다.


포항 해병의 거리. 각종 가게로 빼곡한 이 거리는 1980~199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 요즘에도 이름난 식당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외지인의 발길이 꾸준하다.

포항 해병의 거리. 각종 가게로 빼곡한 이 거리는 1980~199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 요즘에도 이름난 식당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외지인의 발길이 꾸준하다.

남구 일월동에 있는 동문은 주말이면 외출과 외박을 나온 장병으로 가득했다. 특히 동문은 1970년 초반까지 베트남전에 참전한 청룡부대 면회소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장병의 애환을 함께했던 곳이기도 하다. 해병대 동문은 주변에 몰개월 비행기 전시장과 청포도 테마길이 있고,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의 시작점이자 해병대 상륙훈련장인 청림 해변과 도구해안이 가까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해병대 서문 '해병의 거리'에서 영일만 바다로 향하는 동문까지, 해병부대를 둘러싼 포항은 100만 예비역 해병의 제2의 고향이며 아련한 추억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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