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이야기 (에릭 로메르 감독·1996, 2025 재개봉·프랑스)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여름 이야기' 스틸컷. 청년 가스파르가 세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야기다. <안다미로 제공>
2025년 여름,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가 눈부시게 다가왔다. 왜일까? 오래전 봤을 때와 달랐다. 영화는 그대로인데, 보는 내가 달라진 까닭이다. "사소한 이야기로 인생의 깊이를 담아낸다"는 말이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를 잘 설명해준다. 사소함의 소중함을 알 만큼 나도 나이가 든 모양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청년 가스파르는 프랑스 브르타뉴의 한 섬으로 바캉스를 떠난다. 오지 않는 여자친구 레나를 기다리며, 적적한 며칠을 보내던 그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마고를 만난다. 대화가 잘 통하는 마고와 섬 곳곳을 거닐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마고의 지인 솔렌느의 거침없는 접근도 싫지 않다. 솔렌느는 자유분방하고 외모도 뛰어난 여인이다.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던 여자친구도 나타난다.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한 가스파르는 세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떠오른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이야기, 끝까지 봐도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는 것, 찌질해 보이는 주인공 등 분위기가 비슷하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경우, 냉소적이거나 위선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물들은 갈등하고 혼란스러워하되, 진실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대개 시작할 때보다 조금 더 성장한다.
'여름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이다. 아름다운 바다와 숲과 해안절벽을 배경으로 여름의 강렬한 햇빛과 공기가 화면을 채운다. 가스파르 역의 배우 멜빌 푸포의 매력 때문일까. 수줍음과 혼란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청년의 욕망도 밉지 않다. 세 여자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그를 보면, "이 바보야, 뭘 망설여"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누가 봐도 그와 어울리는 여인은 마고이기 때문이다. 섬의 가장 아름다운 배경도 마고와 함께 거닐 때인 걸 보면 감독의 의도인 것 같다. "너와 있을 때만 나 자신이 된다"라고 마고에게 고백하는 가스파르. 하지만 아름다운 솔렌느의 거침없는 접근 앞에서는 또 속수무책이 된다. 이기적이고 불안정한 여자친구 레나 앞에서도 쩔쩔매기만 한다. 연인이란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여야 함을, 부부란 함께 늙어가는 친구임을 알아차리기엔 너무 젊고 미숙하다.
마침내 3주간의 바캉스가 끝나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가스파르, 하지만 그에겐 이제 아무도 없다. 오락가락하다 소울메이트인 마고를 놓친다. 이상형이 나타나도, 내가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어쩔 수 없다. 배를 타고 홀로 떠나는 가스파르의 뒷모습이 안타깝지만, 홀가분해 보이기도 한다. 프랑스어인 '바캉스(vacances)'는 '비우다'는 뜻의 라틴어 'vacare'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뜨거운 한여름은 그렇게 비움의 계절인지 모른다. 비우고 나면 다음 여정이 보인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소한 일상의 대화 속에서 삶의 깊이를 담는 에릭 로메르, 그의 영화가 있어 행복한 여름이다. '여름 이야기'와 함께 '클레르의 무릎'(1970), '해변의 폴린느'(1983), '녹색 광선'(1986) 등이 에릭 로메르 영화의 입문용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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