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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취안저우(泉州) <하>

2025-09-12 06:00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해상 돌다리인 낙양교. 다리의 초석이 배 모양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해상 돌다리인 낙양교. 다리의 초석이 배 모양이다.

취안저우는 도시의 역사만큼 다양한 역사유적이 있다. 먼저 찾은 곳은 낙양교(洛陽橋)였다. 낙양교는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해상 돌다리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북송 때인 1053년에 착공하여 1059년에 완공됐다. 천 년 전에 지어진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규모다. 베이징의 노구교, 허베이의 조주교, 광둥의 광제교와 함께 중국 고대 4대 명교(名橋)로 불리며, 세계 교량 기초의 원조로 평가되기도 한다. 원래 이름은 '만안교(萬安橋)'였다. 만인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이었다. 당나라 원년부터 이곳에 터를 잡기 시작한 중원 사람들이 이곳의 지세가 낙양과 흡사하다고 하여 다리 이름을 '낙양교'로 바꾸어 불렀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다리 이름으로 대신한 것이다.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낙양강 하구에는 굴이 지천이다. 다리 입구에는 굴 무더기 옆에서 굴을 까며 호객하는 아낙네도 지천이었다. 그런데 버리는 굴 패각이 이 다리를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단다. 강바닥에 굴 패각을 다져 넣어 기반 침하를 막고, 조류의 힘도 분산시켜 다리를 보호했다.


국제 무역도시답게 다리의 초석도 배 모양으로 쌓고, 그 위에 장방형 돌을 겹겹이 올렸다. 한눈에 봐도 튼튼해 보이는 것이 또 한 번의 천년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그걸 증명하는 일화도 전해온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개원사의 동서 쌍탑과 낙양교만 온전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취안저우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튼튼함을 '동서탑처럼 서 있고 낙양교처럼 누워 있다'고 비유한다. 낙양교까지 실크로드의 선단이 몰려들어 짐을 부렸고, 다리를 통하여 남북으로 물산이 소통됐다고 하니, 이 다리야말로 취안저우의 국제무역 관문이었다.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가 강학을 했다는 소산총죽서원. 주희가 임직하던 1156년에 건립됐다.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가 강학을 했다는 소산총죽서원. 주희가 임직하던 1156년에 건립됐다.

취안저우의 국제성과 포용성은 사람도 자유롭게 만드나 보다. 취안저우 사람들은 틀에 갇히지 않는 혁신적인 사상가들이 많았다. 소위 포용 도시가 배출한 혁신 사상가들이라 할 것인데, 지금은 고리타분한 학문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는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朱熹)도 사실 당시에는 혁신적인 사상가였다. 성리학이 신유학(新儒學)으로 불린 이유는 기존 유학을 새롭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주희는 당시 불교와 도교에 눌려 있던 기존의 관제 유학을 재해석하여 유학의 전통을 새롭게 개혁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주희는 이 지역의 포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만들어낸 개혁파 지식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취안저우 근처 우계(尤溪)에서 태어난 주희는 취안저우가 국제 무역도시로 성장하던 시기에 이곳에서 활동했다. 그가 무이산(武夷山)에 서원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러 가기 전에 이곳에서 5년간 강학을 했다. 그곳이 바로 소산총죽서원(小山叢竹書院)이다. 이 서원은 주희가 임직하던 1156년에 건립됐다. 당시 이곳의 대학자는 민문지조(閩文之祖)로 불리는 구양첨(歐陽詹)이었다. 그를 모신 불이사(不二祠)라는 사당은 이곳 학자들의 아지트였다. 주희도 여러 차례 이곳에서 강학했다. 그러다 대나무가 무더기로 자라난[叢竹] 야트막한 언덕[小山]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소산총죽서원'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 이곳에는 취안저우의 지역학을 연구하는 '취안저우학연구소'가 있고,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으로 개방되어 주희의 뜻을 기리고 있다. 동네 안의 소공원처럼 소담하게 꾸민 곳이어서 일반 관광객은 찾지 않지만 주희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탁오 생가와 흉상. 동양의 마르틴 루터라고 불리는 이지(李贄)가 나고 자란 곳이다. 탁오(卓吾)라는 자로 더 유명하다.

이탁오 생가와 흉상. 동양의 마르틴 루터라고 불리는 이지(李贄)가 나고 자란 곳이다. 탁오(卓吾)라는 자로 더 유명하다.

소산총죽서원이 있는 리청구(鯉城區)에는 또 동양의 마르틴 루터라고 불리는 이지(李贄)가 나고 자란 곳이다. 그는 '탁오(卓吾)'라는 자로 더 유명한데, '잘난 나'라는 뜻이다. 이름만으로도 범상치 않다. 이탁오는 명나라 때 양명학 좌파 사상가이다. 이탁오 집안에는 아랍과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 많아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거나 색목인(色目人)과 결혼한 조상도 있었다. 그의 할머니 역시 색목인이었다. 아버지는 서당의 선생이었지만, 이러한 집안 내력 덕분에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명나라 양명학 좌파 사상가인 이탁오의 생가와 흉상.

명나라 양명학 좌파 사상가인 이탁오의 생가와 흉상.

이탁오는 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학적 전통, 즉 동향 선배 주희가 확립한 성리학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는 개인의 내면적 깨우침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 양명학파 가운데서도 최고의 이단적 사상가였다. 그는 공자를 '구(丘)라는 이름을 가진 일 개인'이라는 뜻으로 구을기(丘乙己)라고 불렀다. 그 역시 유학자였지만 명대 기득권 세력의 기반이었던 성리학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의 저서를 불태워버려야 할 책이라는 과격한 제목의 '분서(焚書)', 숨겨야 할 책이라는 뜻의 '장서(藏書)'라고 이름 붙였다. 그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이었고, 그래서 평생을 박해받으며 살다가 감옥에서 자결했다.


그의 사상은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유교적 전통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주장한 5·4 신문화운동 때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본과 서구에서는 아시아 근대사상의 시원(始原)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사상의 자유와 남녀평등의 주창자였기 때문이다. 또 세계사적 관점에서 마르틴 루터와 비교하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 동서양에서 각각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었다는 점 때문이다. 신앙의 자유를 주창했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하면서 서양 근대화의 토대가 됐지만, 이탁오의 사상혁명이 좌절된 동양에서는 한동안 자생적 근대화의 이념이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취안저우 괴뢰희 전용극장. 괴뢰회는 취안저우의 대표적 공연예술인 꼭두각시극이다.

취안저우 괴뢰희 전용극장. 괴뢰회는 취안저우의 대표적 공연예술인 꼭두각시극이다.

취안저우가 주희와 이탁오 같은 혁명적 사상가를 배출한 것은 도시의 자유스러움과 포용성 덕분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취안저우의 대표적 공연예술인 꼭두각시극, 즉 '괴뢰희(傀儡戱)'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어렵게 표를 구해 취안저우의 괴뢰희 전용극장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작품 가운데 인기 있는 일부분만 떼어내어 공연하는 '절자희(折子戱)' 공연이었다. 갖가지 모습의 꼭두각시가 푸젠성의 민속과 전설 등에 얽힌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정월 대보름인 원소절(元宵節) 축제를 다룬 공연이었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양한 민족들이 흥미롭게 춤을 추며 등장했다. 여러 나라에서 들어온 진기한 동물들도 함께 등장하여 익살을 부렸다.


취안저우 전통공연 괴뢰희의 원소절 모습 공연.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여 있다.

취안저우 전통공연 '괴뢰희'의 원소절 모습 공연.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전통 괴뢰희에도 외국인과 함께 축제를 즐기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니, 취안저우에서 외국인은 예로부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존재였던 것 같다. 이러한 포용적이고 자유로운 도시 공동체였으므로 토착 종교와 함께 다양한 외래 종교도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 기도실조차 포용하지 못하는 도시에 사는 사람으로서 부러운 장면이었다.


사각형의 토루 화귀루. 육지의 노아의 방주라 불린다. 토루는 객가족(客家族)의 독특한 주거 양식이다.

사각형의 토루 '화귀루'. '육지의 노아의 방주'라 불린다. 토루는 객가족(客家族)의 독특한 주거 양식이다.

푸젠성을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객가족(客家族)의 독특한 주거 양식인 토루(土樓)이다. 토루는 12세기경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남쪽으로 내려온 객가족에 의해 지어졌다. 객가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거대한 집합 주택 토루를 만들어 공동생활을 했다. 보통 3층에서 5층 높이의 원형 혹은 사각형 구조로 지어진 토루는 건물의 벽 두께가 1m에 달할 정도로 두껍고 창문도 고층에만 다는 등 요새처럼 설계됐다. 토루 안쪽의 개방형 마당에는 사당과 우물을 만들어 놓았다. 토루의 출입구는 단 하나이며, 1층에는 부엌과 식당, 2층에는 저장고, 3층부터 침실을 두었다. 한 채의 토루에 최대 8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화귀루 안 마당에 늘어선 상점. 사당을 중심으로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화귀루 안 마당에 늘어선 상점. 사당을 중심으로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푸젠성에는 약 3만5천여 개의 토루가 있으며, 그중에서 46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토루는 난징(南靖) 토루와 용딩(永定) 토루이다. 우리는 취안저우에서 샤먼으로 가는 도중 난징 토루를 들렀다. 난징 토루는 동선에 따라 세 코스가 있는데, 우리는 B코스를 답사했다. 먼저 만난 토루는 '육지의 노아의 방주'라 불리는 화귀루(和貴樓)이다. 사각형 구조에 5층 높이의 흙집은 첫눈에 사람을 압도했다. 입구로 들어서니 사당을 중심으로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마치 현대의 상가주택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안 마당에서 올려다본 상층의 모습은 복도식 아파트 같기도 했다. 이 공간에 한 씨족이 공동생활을 하므로 '씨족 소왕국'이라 불린단다.


운수요 마을. 영화 운수요의 촬영지이기도 한 이곳은 풍경이 고즈넉하고 고풍스럽다.

운수요 마을. 영화 '운수요'의 촬영지이기도 한 이곳은 풍경이 고즈넉하고 고풍스럽다.

5층 주거지에서 바라본 회원루. 3층부터 5층까지는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5층 주거지에서 바라본 회원루. 3층부터 5층까지는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화귀루를 지나면 작은 개울을 끼고 형성된 운수요 마을에 이른다. 이곳은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끈 영화 '운수요'의 촬영지이다. 마을의 골목길이나 풍경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이 고즈넉하고 고풍스럽다. 운수요 마을을 지나면 다시 원형의 토루 회원루가 나왔다. 사각형의 화귀루와는 다른 유려한 멋이 넘친다. 더구나 관광객의 출입이 금지된 상층까지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5층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풍경은 특히 이름다웠다. 층마다 둥글게 이어진 기와 처마는 미려한 곡선으로써 멋진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냈다. 3층부터 5층까지는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위계에 따라 한 가족당 같은 층의 방 2~3개씩을 사용한다. 누군가 "저렇게 살면 숨막히겠다"라고 중얼거린다.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객가족 여자는 중국에서 일등 신부감이다. 한 공간에서 씨족 전체가 공동생활을 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위계에 익숙하고 어른을 잘 모시기 때문이란다. 한때 우리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 않나? 1인가족이 보편화된 지금, 아득한 역사가 되어버렸지만.


원형의 토루 회원루. 사각형의 화귀루와는 다른 유려한 멋이 넘친다.

원형의 토루 '회원루'. 사각형의 화귀루와는 다른 유려한 멋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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