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 5학년 은지(가명)와 할머니가 손을 마주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할머니, 괜찮아요."
5층 계단을 오르기 힘들지 않느냐는 할머니에게, 자신(손녀) 때문에 허리 통증을 참는다는 할머니 말에, 그리고 후원금으로 마련한 아이패드가 망가졌을 때도 은지(12·가명)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사실 은지는 괜찮지가 않다. 외로운 속마음을 감추는 주문이었는지 모른다.
◆12살 소녀의 무거운 일상
초등학교 5학년 은지는 할아버지(86), 할머니(72)와 같이 산다. 치매 증상이 악화된 할아버지는 가끔 빵을 사러 나갔다가 길을 잃어 비를 흠뻑 맞고 오신다. 밤낮없이 큰소리도 낸다. 은지는 할아버지가 때론 무서워서 피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연세가 많으면 다 그런다"며 오히려 할머니를 위로한다.
허리디스크와 골다공증이 있는 할머니는 아파도 병원비 걱정에 진통제로 버티신다. 월 25만원을 받는 공원 청소 일로 세금을 내고 나면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하다. 할머니는 "나이에 장사가 있냐"며 긍정적이다. 다만, "허리가 아파 죽겠다"는 할머니의 신세 한탄이 이어질 때면 은지는 숙연해진다.
◆"이 집 날아갈까봐"…12살 소녀 어깨 짓누르는 빚
은지 아버지는 4년 전 사업 실패 후 연락이 끊겼다. 할머니는 그 빚을 대신 갚기 위해 집을 담보로 3천만원 대출을 받았다. 다행히 이자는 아버지가 직접 갚고 있지만, 할머니는 "이 집을 잃게될까봐 걱정된다"고 노심초사다. 빚을 낸 아버지가 직접 갚아야 해 할머니가 돈이 있어도 대신 갚아줄 수조차 없어 답답할 따름이다.
은지가 올해 초까지 메고 다닌 가방에도 힘든 사연이 투영돼 있다. 은지는 최근에야 유치원 다닐 때 받았다던 낡은 가방을 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 가방을 사 줘서다. 어른들이 준 용돈도 지갑에 꼬박꼬박 모은다. 그만큼 속 깊은 아이다.
은지의 몸은 힘들다. 최근 기력이 떨어지고 자주 코피를 흘려 병원에 갔다. 시력이 나빠 안경도 써야 한다. 요즘은 '외모에 신경 쓸 나이'가 돼서인지, 중학생이 되면 렌즈를 끼고 싶다고 말한다.
◆'돌봄'이 익숙한 은지 "간호사가 꿈"
은지는 고령인 조부모를 대신해 집안 일과 심부름을 도맡아 한다. 종종 할아버지의 병원을 동행하거나 약을 사오는 일도 한다. 할머니의 허리 통증은 자기 몸이 아픈 것 처럼 가슴 아파했다.
이처럼 가족을 돌보는 일이 익숙해진 아이가 꾸는 꿈은 벌써부터 다른 사람을 향한다. 자신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간호사가 되고 싶단다. 이 꿈을 위해 은지는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교회에선 피아노를 연주하고, 지역아동센터에선 영어 공부를 하며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키우고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은지는 이미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최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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