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경이로 가득…신라 천년의 유산은 역사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배경
금장대 철새들도 쉬어가는 곳
서천·북천 합류지점 바위벽에
꽃·도토리·동물 발자국 등등
청동기 시대에 그린 그림 99점
비 오는 날에도 '상쾌한 습기'
새로운 세계 금장대 습지공원
멸종위기 1급 수달의 생활터전
산림자원 잘 보존된 천년숲정원
거대한 우주 안으로 들어선 느낌
"그날 피카소에게 들은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어느 오래된 동네에 가서 본 나무에 관한 것이었다…. 피카소는 그 나무를 내게 설명해주기 위해 나무 자체가 아니라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의 표정이나 무심히 눈길이 갔던 식탁 풍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이 주었던 기이한 오후의 평화에 대해. 모두 나무를 상상해내기에 충분한 말들이어서, 나 역시 거기로 건너가 옆에서 지켜본 것 같았다" (김금희, 사랑 밖의 모든 말들)
경주 토박이 화가의 낭독이 끝나자 우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없이 발 아래 놓인 강의 물결을 바라봤다. 한쪽 발목만 강에 담근 채 정지한 듯 서 있던 왜가리 한 마리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이한 오후의 평화였다. 너무나 넓어서 멈춘 듯 보이는 물결. 아무것 하지 않고 하염없이 보고만 있어도 '그래, 이런 게 사는 거지' 싶은 마음. 강바람에 묻어오는 신선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주는 만족감. 이곳에 사는 것들이 부러웠다.
이것은 형산강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에 관한 이야기다. 덕분에 사람들이 숨쉬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형산강과 경주 시가지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금장대는 경치가 빼어나 경주의 하늘을 나는 모든 기러기들이 반드시 쉬어간다고 한다. 2016년 형산강 팔경에 선정됐다.
◆경주 하늘을 나는 기러기들이 반드시 쉬어간다는 곳
'맑고 탁 트이고 웅장한 금장대!'
금장대에 오르기 전, 입구 안내판에 쓰여있던 글귀였다. 이 글귀를 문화기획자가 비로소 체감한 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금장대의 널따란 마룻바닥을 마치 내 집 마루처럼 뒹굴며 책을 읽고 있던 우리는 다들 또 고개를 주억거렸다. 간결하지만, 금장대에 관해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글귀였다.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장소이자 김동리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 된 곳이라더니, 그저 머물기만 해도 누구나 소설가나 시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풍광이었다.
가을이었고,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다. 그래서인지 금장대에는 오래도록 우리 셋뿐이었다. 다들 말이 없었다. 그저 책을 읽다가 풍경을 바라보다가 또 책을 읽다가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뭔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기이한 형태의 공감이었다.
"잘 봐. 이 일대에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으로 지정된 '노랑부리저어새'가 최근 해마다 출현하고 있거든. 이름 그대로 부리 끝부분이 노랗다는데…."
경주 사는 화가는 지금쯤이면 겨울 철새들이 형산강을 찾을 때라고 했다. 그저 '철새'로 뭉뚱그려졌던 강변의 새들이 고니, 댕기물떼새, 꺅도요, 쇠오리, 비오리 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경주 하늘을 날다가 쉬어가는 곳이 바로 이 금장대라고 했다. 새들이라고 다를까. 날갯짓이 고단하기도 했을 터이고, 또 이 아름다움에 반하기도 했을 터이고. 기이한 형태의 공감이었다.
"해지기 전에 저 습지로 가보자!"
친구의 말에 다시 신발을 신는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양말 밑바닥이 하얬다. 이렇게 사방이 뚫린, 이렇게 넓은 마루를 가진 정자에 쌓인 먼지가 없었다. 마룻바닥이 반들반들했다. 아, 이런 마음으로 이곳에 오는 모든 것들을 쉬어가게 하는구나…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생명과 자연의 기록지 '석장동 암각화'
습지공원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잠시 우리는 옆길로 샜다. 서천과 북천이 만나 형산강을 이루는 지점, 예로부터 물이 맑고 깊어 '예기청소(藝岐淸沼)'라 불리는 곳의 북쪽 바위벽에 그림이 숨어있다고 했다.
"대체 그림이 어디 있다는 거야?"

경주를 두르는 서천과 북천이 만나 형산강을 이루는 곳으로, '예기청소'라 불려온 경치 좋은 곳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청동기 시대 신앙의례 장소로 추정되는데 칼 손잡이, 동물 발자국, 도토리, 꽃 등 다양한 그림이 남아있다.
꽃·동물 발자국·도토리 같은 것들이 무려 99점이나 된다는데, 심지어 바위 옆에는 실제 그림의 위치와 그림 모양까지 친절하게 그려놓은 안내판까지 있었건만 도무지 '이거다' 싶은 그림을 찾기 힘들었다. 이게 바위가 갈라진 틈새인지 아니면 빗방울이 번진 자국인지 애매했다. 온갖 자연현상을 '그림'으로 읽어내며 아등바등하는 우리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그림을 그렸다는 청동기시대 사람들도 그랬겠지?"
처음엔 꽃, 도토리 같은 걸 왜 바위에 새겨넣었을까 싶었다. 그런데 숨은 그림 찾기에 지쳐서 형산강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알 것 같았다. 그들이 이곳에 이렇게 서서 저 강을 바라보며 무엇을 새기고 싶어졌을지.
암각화를 등지고 강을 향해 나란히 선 우리는 비로소 그림을 찾은 것 같았다. 거기에 그들이 바라본 피사체가 있었다.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자연의 흐름이 유유히 흘렀을 형산강. 이곳을 '공존의 대상'이자 '의탁의 공간'으로 인식했을 그들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겹쳐졌다. 기이한 형태의 공감이었다.

수생식물이 흐드러진 금장대 습지공원. 울창한 숲에 들어서면 경주시내와 가까이 있는데도 마치 딴 세상에 온 듯 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한바퀴 도는 데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생명의 교차로 '금장대 습지공원'
습지공원에 들어서니 여긴 또 새로운 세계다. 금장대로 향해갈 때 공원 입구를 흘끗 보고 지나쳤는데, 밖에서 보는 풍경과 한 걸음 안으로 내딛은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가랑비가 촉촉이 내려 습지의 대기는 더욱 습했는데 이런 날씨에도 눅눅한 습기가 아니라 상쾌한 습기였다.
"오, 얼굴이 촉촉해졌는데?"
우리는 서로 농담을 몇 마디 주고 받다가 한참을 그냥 말없이 걸었다. 소금쟁이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들이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강의 무늬도 좋았고, 쏴아아 바람이 부는 순간 나무 이파리들이 일제히 떠드는 소리도 좋았다. 침묵 속에서 비로소 들리는 것들이 있었다.
"나 새벽에 강변 조깅을 하다가 수달 가족을 만난 적도 있다!"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멸종위기 1급 수달도 형산강에 터전을 잡았구나, 그럴만도 하지. 우리는 모두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생태보전을 위해 경주시가 만든 '도시생태 현황지도'에 따르면 수달은 물론 삵, 원앙, 황조롱이 같은 법정보호종이 형산강을 중심으로 전역에 걸쳐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생물군집의 서식공간을 생태적 특성에 따라 유형별로 분류한 정밀 공간지도, 2022). 특히 습지는 다양한 생물종의 서식지로 전 세계 생물종의 40% 이상이 서식하는 곳이다. 형산강이 도심 전체를 감싸도는 경주엔 암곡습지, 토함산습지, 남산습지 같은 습지들이 있다.
신라의 천년의 유산은 단순히 역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경북 지방정원 제1호인 경북천년숲정원. 원래 경북 산림환경연구원의 연구지로 산림환경을 조사하고 자원을 보존하기 위한 곳이었다. 2023년 숲 공원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천년의 역사에서 천년의 생명으로 '경북 천년숲정원'
이곳은 이름 그대로 숲이자 정원이다.
경주 5개의 산과 형산강의 남천, 동천, 서천 3개의 물길을 모티브로 정원 동선을 디자인해 놓은 경북 1호 지방정원. 경북산림환경연구원 부지였던 만큼 산림유전자원이 잘 보존돼 기존의 숲과 꽃이 공존하는 숲 정원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최고의 포토존으로 손꼽히는 곳은 물길을 끌어만든 곳들이다. 때론 마치 거울처럼 숲을 비추고 때론 다리에 걸터앉아 쉼을 누리게 해주는 곳.
물 속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우리는 또 한참 말없이 쳐다 보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가 겹치는 순간들이 있다.
거대한 우주 속으로 들어선 느낌. 신선한 공기.
생태란 것이 어디 먼 데 있는 줄 알았는데, 그저 이렇게 시간을 함께 보내고, 함께 보내는 그 시간을 귀히 여길 줄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산강을 따라 형산강 옆에 있다보면 어느새 모두가 생태학자가 되는 걸까. 서서히 우리는 형산강에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주시>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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