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이른 아침 공원을 돌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살폈으나 연주자가 보이지 않았다. 야산 중턱 어딘가쯤, 인적이 드문 곳에 홀로 서서 불고 있는 모양이었다. 수줍어서일까. 자신이 없어서일까.
딸이 오랜 유학 생활 끝에 첫 오케스트라의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막상 막이 오르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무대에서 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덩치 큰 서양 남자들 속에서 말석에 앉은 딸은 음악회 내내 손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평생토록 배우 되기를 소원했던 엑스트라가 '맨발의 청춘'에서 거적 아래로 발만 나온 것과도 같았다.
가슴이 미어졌다. 겨우 저것 하려고 어린 나이에 부모 떠나와, 스타카토로 시간을 끊어가며 하루 8시간씩 연습했던가? 겨우 저것 하려고 체중 감소에 생리 불순까지 겪으며 음악에 올인했던가?
색소폰이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휴식 중인가 보았다. 공원에 있는 많은 사람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테니스를 치던 중년 남자는 라켓을 든 채 멈춰 섰고, 조깅을 하던 젊은이는 속도를 늦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훌라후프를 돌리던 아줌마는 허리를 세우고 먼 곳을 살폈고, 뜀박질하던 강아지는 킁킁거리며 주인을 보챘다.
약속이나 한 듯 '멈춰'가 풀렸을 때는 색소폰 소리가 다시 들렸을 때였다. 테니스도 조깅도 훌라후프도 다시 돌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운동하던 사람들만 그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장미도, 비둘기도, 연못의 수련마저도 색소폰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엄마와 달리 딸은 손만 나온 첫 연주가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청중과 동료들의 격려를 받으며 상기된 낯빛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오늘처럼 편안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들렸음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해가 솟으며 색소폰 소리도 잦아들었다. 지금쯤 그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악기를 챙기고 있을 터였다. 나는 음악회 내내 손만 보여주던 딸의 첫 연주를 생각하며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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