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 소설가
"역사적 사실이 작품으로 나타나기까지 작자의 태도를 따라 대별하여 두 가지 경로를 밟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작자가 허심탄회로 역사를 탐독완미하다가(인용자 주: 열심히 읽고 즐기다가) 우연히 심금을 울리는 사실을 발견하고 작품을 빚어내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사실 자체가 주제를 제공하고 작자의 감회를 자아내는 것이니 순수한 역사작품이 대개는 이 경로를 밟지 않나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작자가 주제는 벌써 작정이 되었으나 현대에 취재하기도 거북한 점이 있다든지 또는 현대로는 그 주제를 살려낼 진실성을 다칠 염려가 있다든지 하는 경우에 그 주제에 적당한 사실을 찾아내어 얽어놓는 경우입니다. 제1의 경우라고 해서 대작신품(놀라운 명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2의 경우에 웅편걸저(대단한 저서)가 더 많지 않은가 합니다."
앞의 글은 대구가 낳은 걸출한 민족문학가 현진건이 1939년에 쓴 '역사소설 문제'에서 인용한 것이다.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하기에 더 적합한 제재가 과거의 일에서 발견되면 그때 역사소설을 쓰라는 가르침이다.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역사 관련 문학작품을 쓰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태조 왕건'은 상당히 예전 사극인데 어쩐 까닭에서인지 요즘도 전파를 타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고려 장군 박술희와 후백제 장군 애술의 결투 장면을 봤다. 박술희는 고려 3대왕 정종으로부터 반역 의심을 받아 945년 10월24일 죽었다.
이 사극을 보다가 가장 안타깝게 여긴 전개는 동수대전에서 구사일생으로 달아난 왕건이 앞산 왕굴을 거치지 않고 개성으로 돌아가는 부분이다. 극중 왕건은 시량리 산비탈에서 추락한 뒤 그곳 주민에게 주먹밥을 얻어먹고, 장군 복지겸 등에게 발견되어 안정을 되찾게 된다. 신숭겸 장군 유허비가 있기는 해도 시량리는 흥미성과 현장성에서 앞산 왕굴만 못하다. 왕굴은 생생한 실물이 남아 있는데다 독립운동유적인 안일사와도 얽혀 있어 훨씬 역사성이 강하다. 사극이 왕굴을 다루어 주었으면 대구 앞산 홍보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참으로 아쉽다.
그래도 이 사극은 앞산을 누락시켰을 뿐 역사를 왜곡하지는 않았다. 영화 '명량'이 명량해전에 쓰인 바 없는 거북선을 전투에 가담시키고, 조선군이 절대 불리한 판옥선 갑판 위 백병전을 줄곧 화면에 띄워 역사를 왜곡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역사를 제재로 삼는 예술가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의 자유이다. 다만 상업 목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면 안 된다. 현진건은 "주제에 적당한 사실을 찾아내어 얽어놓으라" 했다. 그 지점이 바로 역사소설을 쓸 때 부딪히는 어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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