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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추 거문고 이야기] <44> 신라 보물 거문고

2025-11-06 13:27
왕실 보물창고인 천존고에 보관돼 있던 신라 국보 거문고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되돌아와 나타난 곳인 경주 백률사. 전각으로 대웅전과 범종각만 있는 작은 사찰이다.

왕실 보물창고인 천존고에 보관돼 있던 신라 국보 거문고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되돌아와 나타난 곳인 경주 백률사. 전각으로 대웅전과 범종각만 있는 작은 사찰이다.

신라 수도인 경주 월성에 신라 왕실의 보물창고인 천존고(天尊庫)가 있었다. 이 천존고에는 선대 임금으로부터 전해지는 두 가지 보물이 있었다. 그 하나는 신라 31대 신문왕 때 용이 가져다 준, 검정 옥대로 만든 젓대인 '만파식적(萬波息笛)'이다. 이것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며,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가 개고,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잦아지는 신기한 힘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대금이다. 다른 하나는 검은 학을 부른 고구려의 거문고가 있었다.


삼국유사 '백률사(栢栗寺)' 편에 실린 국선(國仙:화랑의 지도자) 부례랑 이야기를 통해 거문고가 신라시대에 어떤 존재감을 지녔는지 엿볼 수 있다.


신라 32대 효소왕(재임기간 692~702) 즉위년인 692년 9월7일 부례랑(夫禮郞)을 국선으로 삼았다. 국선으로 임명된 부례랑은 그 문객이 1천여명이나 됐다. 그중 화랑 사선(四仙)이 유명한데, 사선 중에서도 안상(安祥)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신라 화랑 사선은 안상과 영랑, 남랑, 술랑이다.


즉위 이듬해인 693년 3월에 부례랑이 화랑 무리를 이끌고 강원도 금란(지금의 강원도 통천)으로 유람을 나가 북명(원산만 부근)의 국경에 이르렀다가 그만 말갈적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이에 부례랑의 문객들은 당황하여 되돌아왔으나, 안상만은 그를 뒤쫓아갔다. 효소왕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말했다.


"선왕께서 만파식적을 얻어 나에게 전하여 지금 현금(玄琴:거문고)과 함께 천존고에 고이 모셔 놓았는데, 무슨 일로 국선이 갑자기 말갈적에게 붙잡혀갔는지 모르겠으나 이를 어쩌면 좋을꼬?"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었다. 왕이 다시 떨리고 겁이 나서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고방 속에 있던 현금과 만파식적 두 가지 보물이 모두 없어져 보이지 않았다. 이에 효소왕은 "내가 얼마나 복이 없고 불행하기에 어제는 국선을 잃었는데, 또 다시 현금과 만파식적을 잃었을까"라고 하면서 고방 담당자인 관리 김정고 등 다섯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해 4월, 왕은 국내에 현상 모집하여 "현금과 만파식적을 찾는 사람에게는 한 해의 납세를 상금으로 주겠노라"고 하였다. 5월15일에 부례랑의 양친이 백률사 관세음상 앞에 가서 여러 날 저녁, 정성어린 기도를 드렸다. 얼마 후 기도 중 갑자기 향을 피우는 탁자 위에서 현금과 만파식적 두 보물이 나타났고, 부례랑과 안상이 관세음상 뒤에 와 있었다.


부례랑의 양친이 넘어질 듯이 기뻐하며 돌아오게 된 사연을 물었더니, 부례랑이 말했다. "제가 말갈적에게 붙잡혀간 뒤부터 대도구라(大都仇羅) 집의 짐승 치는 말먹이꾼이 되어 대오라니 들에서 방목을 하는데, 홀연히 용모와 거동이 단정한 스님 한 분이 나타나 손에 현금과 만파식적을 들고 와서 위로하며 '고향 생각이 나는가'라고 말하기에 저도 모르게 절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임금님과 부모님을 그리워함을 어찌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라' 하면서 저를 데리고 해안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안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만파식적을 둘로 나누어 우리 두 사람에게 한 쪽씩 타게 하고 스님은 현금을 탔는데, 둥실 떠가더니 잠깐 사이에 이곳까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세한 사정을 급히 효소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깜짝 놀라 사람을 시켜 부례랑을 영접했다. 부례랑은 현금과 만파식적을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왕은 두 보물을 다시 천존고에 옮겨 보관하게 했다.


왕은 너무나 감격하여 50냥씩 되는 금그릇과 은그릇 다섯 개씩 두 벌과 누비 가사 다섯 벌, 비단 3천 필과 밭 1만경을 백률사에 시주하여 관세음상의 자비로운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효소왕은 국내에 대사면을 내리고, 백성들의 납세를 3년간 면제해 주었다. 또한 부례랑을 대각간으로 삼고, 그의 아비 대현 아찬에게 태대각간 벼슬을 주고, 어미 용보부인은 사량부의 경정궁주로 삼았다. 화랑 안상은 안상법사로 명하여 대통으로 삼았다.


그 후 6월12일에 혜성이 동쪽에 나타나고 17일에는 서쪽에 나타나자 천문을 맡은 관리가 왕께 아뢰기를 "이것은 현금과 만파식적의 상서로움에 대하여 작위를 봉하지 않은 까닭입니다"라고 고하니, 효소왕은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높이어 불렀더니 혜성이 사라졌다. 김정고 등 5명도 풀어주고, 위로 차원에서 5급 벼슬도 내려주었다.


◆백률사에 되돌아온 신라 국보 거문고


이 이야기는 신문왕의 태자로 왕위에 오른 효소왕이 삼국통일의 선봉이었던 호국무사 화랑 무리의 위력을 실감하여, 이와 같은 신이한 이적을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자 바로 반란을 일으킨 풍월주 세력들이 아직은 그들을 따르는 무리의 수가 왕권을 넘보는 수준에 있었고, 이것을 타개할 수 있는 묘안이 효소왕에게는 절실히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 이야기를 통해 거문고가 만파식적과 함께 신라의 가장 소중한 국보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률사는 경북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에 있는 사찰이다. 백률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는 계기가 된 이차돈 순교와 관련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527년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흰 피가 솟구치고 잘린 목은 소금강산까지 날아갔고, 날아간 목이 떨어진 자리에 세운 절이 백률사라고 한다. 법흥왕 때 건립했는데, 처음 이름은 자추사였다.


백률사에는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금동불상인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를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상당히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률사에 있던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이차돈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현재 백률사는 법당이 대웅전 하나뿐인 작은 사찰이다. 이전의 대웅전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선조 때인 1600년경에 재건된 것이다. 대웅전은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범종각에 걸린 범종(1985년 제작)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잘린 목에서 흰 피가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양쪽 면에 새겨놓고 있다.


글·사진=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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