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삼성서울병원 건설 현장에 방문한 이건희 회장. 연합뉴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할 때, 삼성 내부에서는 이상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다. 한쪽에서는 기술과 경영의 진보를 위해 그룹 차원에서 벤치마킹을 하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과거와 같은 구시대적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건들이 터졌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은 다음과 같았다.
◆몰래카메라의 시작
삼성그룹에는 '몰래카메라'라는 것이 있었다. 한때 TV에서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이 유행했지만, 삼성그룹은 이미 1983년부터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장면들을 그룹 내 방송인 SBC를 통해 방영해왔다.
그 첫 방송은 '얌체 주차족'이었다. 삼성 일부 계열사 직원들 가운데 고객을 위해 비워둔 주차장에 자기 차량을 주차하는 얌체족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룹 방송인 SBC가 이 장면을 촬영해 고발한 것이 효시였다. 이후 몰래카메라는 사내 문제점을 촬영·방송해 직원들에게 경종을 울렸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세탁기 사건'이다.
1993년 6월 어느 날, 몰래카메라는 삼성전자 세탁기 생산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장면은 세탁기 생산라인이었는데, 납품된 세탁기 뚜껑의 플라스틱 부품이 규격에 맞지 않자 현장에서 칼로 2㎜를 깎아내 조립하는 모습이었다. 주문은 밀려오고 생산대수는 맞춰야 하는데, 납품 부품의 규격이 맞지 않자 임시방편으로 깎아 넣었던 것이다. 제대로 하려면 뚜껑 부품을 새로 설계해 금형을 뜬 뒤 다시 생산해야 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플라스틱을 깎던 하청업체 직원이 다른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우자 다른 직원들이 긴급 투입되어 직접 부품을 깎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생산현장 직원들은 플라스틱 부품을 깎아 조립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깎아서 넣어도 사용하는 데는 이상이 없다"는 인식이었다. 한마디로 불감증이었다. 그것이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삼성의 생산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장면이 그룹 방송 SBC를 통해 방영되자 관계자들은 물론 경영진까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국에서 물건을 가장 잘 만든다'는 삼성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질(質) 경영'의 탄생
"품질 불량 제품을 만드는 것은 회사를 좀먹는 암적 존재이자 경영의 범죄 행위이다. 품질은 국제 경쟁력의 가늠자이며 그룹 생존권의 문제이므로, 품질 불량 제품을 단 한 개라도 만드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공장 가동을 중단하거나 시장점유율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근본적인 불량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임직원 평가 및 회사 경영의 모든 기준을 '질 위주'로 바꿔 불량률을 반드시 선진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특히 품질 문제에서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곳은 가전제품 부문으로, 불량률이 국내에서는 가장 낮으나 세계 최고인 일본 수준에는 뒤처져 있다. 세계 수준으로의 도약이 시급하다. 선진 제품과 경쟁하기 위해 품질 개선에 집중하다 보면 일시적으로 매출과 시장 점유율이 줄어들 수 있으나, 최고 수준의 품질만 확보된다면 1~2년 만에 더 큰 성장과 시장 확보가 가능하다."
'몰래카메라 세탁기 사건'으로 인해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대장정은 큰 변화를 맞았다. 대책은 '질(質) 우선 경영'으로 급선회했다. 이후 삼성전자의 세탁기 생산라인을 비롯한 가전제품 139개 생산라인에 '라인 스톱제'가 전면 도입됐다. 불량이 발생하면 즉시 라인을 멈추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가동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세탁기 생산라인에서는 261개 항목에 달하는 설계 입력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고, 전 세계 일류 세탁기 제품의 세탁 방식도 비교·연구됐다.
세탁기 몰카 사건으로 삼성은 양적 성장을 중단하고 품질로 거듭날 때까지 새로운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선언했다. 프랑크푸르트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도 품질대책회의를 열고 '라인 스톱제' 등 다양한 개선책을 논의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삼성 제품의 질은 곧 삼성의 얼굴이다"라는 내용을 채택하며 회의를 마쳤다. 복합화·국제화에 앞서 품질을 개선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국내외 100여 명의 임직원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품질대책회의를 갖고 여러 혁신적 방안을 결정했다.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호텔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고 있다. <삼성 제공>
◆김장독 냉장고 사건
1993년 7월27일 오전 10시40분. 삼성전자 생산기술실 기술팀장 오모(39)씨와 개발실 직원 이모(31)씨는 금성사(현 LG전자)에 냉장고 부품을 납품하던 노드슨상사 대구영업소 소장, 직원 1명과 함께 명함을 준비해 노드슨상사 직원으로 신분을 위장한 뒤 금성사 창원 1공장으로 들어갔다.
금성사 측은 평소 알던 노드슨상사 직원들이라 의심 없이 일행에게 김치냉장고 생산라인을 안내했다. 그들은 한 시간여 동안 '김장독 냉장고' 생산라인을 돌아보다 이를 수상히 여긴 금성사 생산기술실장에게 붙잡혔다. 금성사는 70억 원의 연구비와 10개월의 연구 과정을 거쳐 김장독 냉장고 설비기술을 개발한 상태였다. 삼성 직원 두 사람은 금성사 제품이 시장점유율에서 10% 이상 앞서가자, 그 핵심 기술인 단열 기술을 알아보기 위해 침입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당시 금성사는 노드슨상사에서 납품하는 '핫멜트 머신'으로 단열 공정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절도미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건조물 침입) 혐의로 입건돼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발생 다음 날인 7월28일 밤 9시20분경에야 이건희 회장에게 보고됐다. 보고를 받은 이 회장은 일본 후쿠오카 뉴오타니호텔에서 신경영회의를 주재 중이었는데, 크게 노발대발했다.
"돈 주고 사오라는 기술은 안 사오고, 뭐 하는 짓들이냐!"
결국 삼성은 금성사에 사과했고, 금성사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사건은 마무리됐다. 더이상 사건이 확대돼봤자 대기업 간 이미지에 악영향만 미치기 때문이었다.
◆제일모직 가짜 라벨 사건
1994년 2월, 한 TV 뉴스는 양복지 제조 연월일을 변조한 제품을 고발했다. 제일모직이 그 전해에 만든 '갤럭시' 양복 3천800벌의 제조 연월일을 변조해 마치 해당 연도 신제품처럼 판매한 것이다. 이는 그 해 4월부터 의류의 제조 연월일 표시를 없애기로 한 업계 분위기를 이용해 판매를 조금이라도 늘려보려 한 계획이었다. 당시 담당자들은 "양복은 식품처럼 변질되는 물건이 아니므로 소비자 피해는 없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이건희 회장의 격노를 샀다. '질경영'을 주창하던 시점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제일모직은 갤럭시 생산라인을 중단했고, 주요 일간지에 사과 광고를 게재했다. 임직원들은 줄줄이 이건희 회장에게 불려가 호통을 들었으며, 안양공장 공장장과 관련자 전원이 문책을 받았다. 이후 전 직원이 '정신 재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삼성 내부에서 '불면의 계절'과도 같은 시기였다.
기술과 경영 혁신의 전면에서는 세계를 향한 신경영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과거의 구습과 불감증, 기업 윤리 문제는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기업 내부의 잘못과 문제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곧 기업의 경쟁력과 사회적 신뢰를 갉아먹는 암세포이며, 방치할수록 조직 전체를 위협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한순간의 불감증이 글로벌 시장에서의 생존을 흔드는 폭풍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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