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지켜온 영혼의 등불…300년 된 곰솔, 오늘도 푸르게 빛난다
울진의 곰솔은 바닷바람과 염분에 강해 해안 방풍림과 사구 보호림으로 조성돼 마을을 지키는 천연 방벽이 된다. 거북 등껍질처럼 거칠게 갈라진 검은빛 수피(樹皮)에서 곰솔이라는 이름이 비롯됐다. 곰솔은 줄기는 곧고 단단해 의연하고 강인한 인상을 준다.
높이 17m·둘레 5m 경북도 대표 해송
해안 방풍림과 사구 보호림으로 조성
언덕서 동해·마을 굽어보는 자태 장엄
정월대보름엔 곰솔 아래 모여 풍요 기원
울진군, 명사십리 곰솔 벨트 조성 추진
관광객 1천만명 대비 솔향 쉼터 만들어
나무는 땅과 하늘을 잇는 가장 오래된 다리다. 인류는 나무를 단순한 생명체가 아닌, 삶과 영혼을 이어주는 신성한 매개체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일찍이 나무에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에도 영혼(Psyche)이 있다고 했다. 식물의 아버지 테오프라스토스는 나무를 '잎이 달린 땅의 창조물'로 묘사하며 그 강인한 생명력을 찬미했다.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은 "산림은 곧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의 생계 수단"이라고 말하며 나무와 숲을 경제와 문화의 토대로 바라봤다. 중세 유럽에서 숲은 '신의 정원'이었고, 동서양의 시인들은 나무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생명의 순환을 노래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만 명의 그늘을 만든다"라는 속담처럼 당산목, 신목, 보리수 같은 거목은 공동체의 안식처이자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의 중심이었다. 인간은 나무 밑에서 지친 마음을 쉬며 자연과 삶, 시간과 마음이 하나로 얽혀 있음을 깨달았다.
◆신화와 종교에 새겨진 나무의 지혜
가장 오래된 지혜는 언제나 나무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신화와 고대 종교에서 나무는 세계의 근원과 영적인 질서를 품은 신성한 상징이었다. 북유럽 신화의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아홉 세계를 관통하며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의 세계를 잇는 생명의 축이 됐다. 그것은 곧 우주의 연속성과 영원성을 상징했다.
동양에서도 그 신성함은 깊었다. 한국의 당산목은 마을의 수호신이 머무는 곳이자 사람들의 소망을 전달하는 통로로써, 공동체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는 신앙의 상징이었다. 나무는 곧 신이 강림하는 자리이자 인간이 하늘의 뜻(天命)을 듣는 통로였다.
고대 인도의 보리수는 우주의 중심을 의미하며, 석가모니가 그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지혜와 해탈의 상징이 됐다. 켈트족의 영적 지도자인 드루이드는 숲을 신전으로 삼고 나무의 뿌리와 가지에서 생명의 순환과 만물의 연결 원리를 배웠다. 그들은 나무를 우주와 인간을 연결하는 가장 신성한 존재로 섬겼다.
이처럼 나무는 문학과 철학, 신화와 민속, 종교와 과학사까지 아우르며 인간 문화의 심층에 자리 잡았다.
나무를 아는 일은 곧 인간 존재와 우주의 섭리를 탐구하는 인문학의 출발이었다. 나무의 나이테에 새겨진 시간의 결은 마치 오래된 시(詩)의 행처럼, 우리가 잊고 살아온 진실을 은은한 울림으로 되살리며 인간의 마음속에 깊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시간의 저편에서 흘러온 미묘한 빛처럼 내면의 가장 고요한 자리에 스며든다.
◆해풍을 이겨낸 강인함
곰솔은 상록 침엽 교목으로, 육상 소나무(赤松, 적송)와 달리 해안성 소나무다. 흔히 해송(海松) 또는 흑송(黑松)이라 부른다. 거북 등껍질처럼 거칠게 갈라진 검은빛 수피(樹皮)에서 '검은 솔→거믄솔→곰솔'이라는 이름이 비롯됐다. 줄기는 곧고 단단해 의연하고 강인한 인상을 주며, 잎은 9~14㎝로 길고 질기다. 바닷바람과 염분에 강해 해안 방풍림과 사구 보호림으로 조성돼 마을을 지키는 천연 방벽이 된다. 수형이 아름다워 조경수이자 문화적 상징수로서 가치도 높다.
울진 곰솔 뒤로 봉산리 마을 풍경이 펼쳐져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봉산리 곰솔은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당산목, 곧 마을을 지켜온 영혼의 등불이다.
◆쌍룡이 하늘로…봉산리 당산목의 위엄
경북 울진군 기성면 봉산리 산1-8, 언덕 위에 선 봉산리 곰솔(보호수 10-22-01)은 300년 넘게 마을을 지켜온 수호목이다. 높이 17m, 둘레 5m의 이 나무는 경북도를 대표하는 해송으로, 거센 해풍에도 꺾이지 않는 생명력으로 유명하다. 검은 수피는 용의 비늘처럼 거칠게 갈라져 있고, 두 줄기가 맞닿아 하나로 선 형상은 마치 쌍룡이 하늘로 오르는 듯하다. 언덕에서 동해와 마을을 굽어보는 자태는 장엄하고 의연하다.
해풍에도 질긴 푸른 솔잎은 사계절 내내 생명의 기운을 뿜어내며, 검은 수피와 대비돼 신목의 영혼처럼 푸르게 빛난다. 마을 사람들에게 봉산리 곰솔은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당산목, 곧 마을을 지켜온 영혼의 등불이다.
두 줄기가 하나로 이어진 몸통은 음과 양, 생명과 우주의 조화를 상징하며, 자식이 없거나 간절한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정월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곰솔 아래 모여 제를 올린다. 무속인들은 바닷바람에 실린 소리를 들으며 평안과 풍요를 빈다. 사람들은 햇살과 해풍이 나무껍질 사이로 스며드는 그 순간, 오래된 신령의 숨결과 고요한 평화를 느낀다.
세월이 흘러도 이곳을 지나는 이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음을 다듬는다. 아이는 자라 다시 그 나무를 바라보고, 노인은 그 곁에서 지난 세월을 떠올린다. 곰솔은 세대를 잇는 마을의 기억이자 역사의 증인이다.
울진 봉산리 마을 전경. 정월대보름이면 봉산리 사람들은 곰솔 아래에서 제를 올린다. 봉산리 곰솔은 자연과 사람, 신앙이 어우러진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저물녘, 노을과 그림자가 어우러지면 하늘과 바다, 인간의 삶이 하나로 녹아드는 장엄한 순간이 펼쳐진다. 솔잎 향과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감도는 그곳에는 시간마저 더디 흐르는 듯한 평화가 깃든다. 봉산리 곰솔은 자연과 사람, 신앙이 어우러진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이 신목은 하늘과 바다를 품은 전설이며, 인간과 자연, 영혼을 이어주는 다리로 오늘도 묵묵히 서 있다.
◆지역발전과 생태보존, 울진 곰솔벨트 사업
울진군은 관광객 1천만 시대를 대비해 '명사십리 곰솔 벨트 조성 사업'을 추진 중이다. 후포해수욕장과 후정해수욕장에는 이미 해안 곰솔 숲이 조성돼, 바닷바람과 솔향이 어우러진 쉼터가 생겼다. 흥부 해안 숲 등 네 곳에도 조성이 진행 중이다.
손병복 울진군수는 "곰솔 벨트를 조기에 완성해 울진을 찾는 모두가 이 숲속에서 평화와 여유를 누리길 바란다"라며 "곰솔 숲을 중심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사계절형 오션리조트를 조성해, 자연·문화·휴식이 공존하는 울진의 매력을 키워가겠다"라고 밝혔다.
이 사업은 단순한 관광 인프라를 넘어, 수백 년 곰솔이 지켜온 울진의 풍광과 마을의 숨결을 보존하며, 세대를 잇는 생태·문화적 다리를 놓는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로 기대된다.
◆기후 시대의 성찰…숲과 인간, 미래의 공존
봉산리 곰솔 앞에 서면 나무와 숲이 인간 존재의 근원과 닿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굳건한 몸통과 하늘로 뻗은 가지마다 세월의 잔향과 인간의 발자취가 스며 있다. 그것은 자연이 전하는 오래된 언어다. 지금 우리는 기후변화와 생태계 붕괴의 현실 앞에 서 있다. 곰솔의 자태를 바라보며 숲이 사라지면 인간 또한 존재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언덕에서 동해와 마을을 굽어보는 곰솔의 자태는 장엄하고 의연하다. 곰솔은 단순히 서 있는 나무가 아니다. 세월과 생명을 이어주는 지구의 심장이다.
1854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가 인디언의 땅을 사들이려 했을 때, 시애틀 추장은 싸움이 아닌 지혜의 편지로 답했다.
그는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는가.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에게 이 땅 모든 부분은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언덕, 깊은 숲속의 안개, 밝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한 것들이다. 만일 모든 짐승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커다란 영혼의 고독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마지막 인디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의 기억이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가 될 때도 이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종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 이 땅을 사랑해 달라"라고 말했다. 편지가 후세에 약간 각색됐다고 하지만, 그 진심은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히 메아리친다.
검은 수피와 솔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곰솔은 단순히 서 있는 나무가 아니다. 세월과 생명을 이어주는 지구의 심장이다.
숲은 인간보다 먼저 앞을 본다. 하늘로 뻗은 솔잎마다 미래를 향한 경고와 희망이 깃들어 있다. 봉산리 곰솔은 오늘도 우리에게 가만히 일러준다. "숲과 나무를 훼손한다면, 결국 당신 자신의 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나무는 말하지 않지만, 천천히 세상을 바꾼다.
글=윤일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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