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누보와 사이키델릭
알퐁스 무하의 욥(Job·1896), 오른쪽은 스탠리 마우스와 앨튼 켈리의 빅 브라더와 지주회사 포스터(1966). <출처: czechcenter>
역사적으로 미학적 표현은 시대를 넘어 재등장하고 있다. 1960년대 우주선 발사, 팝아트,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움직임 등 사회문화적 격변기에, 그로부터 60~70년 전에 유행한 자연주의적 유기적 미학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문화·예술사조인 아르누보(Art Nouveau)와 1960년대 환각적 체험에서 파생된 문화적 경향인 사이키델릭(Psychedelic)은 시대적, 그리고 고상함(?)의 차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감성적, 표현적 측면에서는 공통적 맥락을 가진다.
19세기 중후반 유럽에서는 기술의 혁신으로 증기기관, 철강산업, 교통수단의 발달, 방적기의 발명이 가능하게 됐고, 이러한 산업혁명의 기계문명은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했지만 동시에 예술적 감성은 희미하게 했다. 그 반동으로 아르누보, 즉 새로운 예술에 대한 움직임이 등장하여 사회문화적으로 '예술과 일상의 통합'을 지향했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유기적인 선과 유려한 장식미는 도시의 생활에 반영됐다. 아르누보의 대표적 작가인 알퐁스 무하(Alphonse Mucha)의 포스터 작품은 유기적인 패턴과 부드러운 색감으로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이미지로 당시 아르누보의 감각을 확장시켰다.
아르누보 시대의 곡선적 드레스(1901). 아르누보는 곡선미, 유기적 식물, 신비로운 여성의 형상으로 유려한 장식미를 나타냈다. <출처: THE MET>
아르누보는 인공적 직선이 아닌 자연의 곡선에 미학적 가치를 두고 움직이는 듯한 곡선미, 유기적 식물, 신비로운 여성의 형상으로 유려한 장식미를 나타냈다. 이는 19세기 말 코르셋으로 구속된 여성의 패션에도 반영됐고 몸의 자연스러운 곡선을 따라 흐르며 식물의 줄기처럼 유려한 실루엣을 구현하는 드레스가 대표적이다. 특히 자유로운 여성의 몸을 강조한 디자이너인 폴 푸아레(Paul Poiret)와 당시 디자이너들은 무하의 포스터 속 여인처럼 덩굴, 연꽃, 곤충 등 곡선적이고 감각적인 무늬를 적용하여 여성의 신체를 예술의 일부로 확장시켰고 감각적 조형물로 완성했다. 당시 아르누보 미학적 특징의 패션은 연한 안개가 덮인 듯한 색조의 베이지, 보라, 녹색 등 부드러운 색감으로 덮혀 있었다.
약 반세기 뒤 1960년대, 또 하나의 문화적 반전이 일어났고, 이는 1970년대 너머로 이어졌다. 1960년대 계속됐던 냉전, 당시 패권국이었던 미국의 베트남전쟁 파병, 산업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청년 반문화 운동으로 발생됐고 사이키델릭은 그 시각적 언어였다. 사이키델릭은 비정상적 정신상태와 의식 확장을 유발하는 약물이나 경험을 의미하며, 이러한 물질의 영향은 당시 음악, 패션, 문화예술에 표현됐다.
에밀리푸치의 사이키델릭 스타일의 드레스(1970). <출처: The Museum at FIT>
기존 질서와 논리에 대한 감각적 해방, 시각적 변형, 무의식적 표현이었던 사이키델릭은 당시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등의 록밴드의 공연 포스터에 형광색의 소용돌이 패턴으로 채워졌다. 즉 19세기 말 아르누보의 유기적 곡선이 담긴 알폰스 무하의 유기적 곡선과 신비한 여성의 이미지는 1960년대 의도적으로 차용됐다. 왜곡된 문자와 그래픽, 환각적 유동감, 소용돌이 패턴으로 오마주됐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팝아트와 영패션이라는 트렌드와도 맞물려 패션에서도 유사한 특징으로 나타났다. 에밀리오 푸치(Emilio Pucci), 오시 클락(Ossie Clark)과 셀리아 버트웰(Celia Birtwell),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등 당시 패션디자이너들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아르누보의 유기적 곡선과 닮은 유동적 곡선과 패턴을 사이키델릭적인 고대비 색채의 패션으로 발표했다. 마치 두 시대의 미학을 패션으로 결합한 듯했다.
아르누보의 부드러운 색감은 사이키델릭에서 강력한 색 대비와 높은 채도의 형광색으로 변색됐다. 하지만 그 둘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감성적 저항의 언어라는 공통적 정신을 가진다. 19세기 말 아르누보가 산업문명 기계적, 직선적 세계에 반대하여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의 결합을 나타낸 것이라면, 1960년대 사이키델릭은 전쟁과 소비사회에 반대하여 정신적 자유와 감각의 확장을 강조한 의식의 해방을 추구했다. 이 두 흐름은 모두 시각적 곡선을 통해 인간의 감각이 가진 생명력을 드러냈고 패션은 그 감각을 몸으로 입는 예술이 됐다. 오늘날 패션 세계에서도 여전히 곡선의 예술과 자유의 색채는 흐르고 있다. 아르누보와 사이키델릭은 다른 시대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감각의 해방이라는 같은 꿈을 꾼 예술일 것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