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윤자 시민기자
바람 불고 간간이 빗발까지 치던 지난 11월 어느날, 특별한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였다. 1급 시각장애인 정연원씨의 수필집 '에세이로 만난 클래식 산책'을 기념하는 행사다. 이 책은 '주저앉다' '일어서다' '걷다' '즐기다' 등 총 4부로 구성됐다. 특히 3·4부는 시각장애인이 되어 방황하다가 다시 음악 연주회장을 찾은 해후의 여정을 담았다. 글 말미의 QR코드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도 있다. 클래식과 가까워지려는 입문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책이다.
정씨를 처음 만난 때는 2011년으로, 화재 사고로 아내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자신은 더 이상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는 1급 시각장애인이 된 지 10여년이 흐른 뒤였다. 고교 음악교사와 대학 교수·학장까지 지낸 그였지만, '캄캄한 현실'은 그를 세상과 단절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그가 세상과 다시 소통하게 된 것은 '녹음도서' 덕분이었다. 점자도서관을 통해 녹음된 도서를 배달받아 귀로 세상을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독서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 해 동안 읽은 책이 무려 617권.
당시 필자는 사연을 접한 후 정씨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 강좌에 등록했다. 녹음도서를 듣던 그가 글을 쓰기 위해 수필강좌에 등록했기 때문이다. 함께 수필강의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 친해졌지만 그의 삶을 들려 달라고, 기사를 쓰고 싶다고 말하는 게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아픈 기억을 상기시켜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3월에 시작한 강좌가 마무리될 즈음인 6월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함께 걷고 싶다고.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함께 형제봉에 오르며 그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그의 이야기가 그해 영남일보 동네뉴스에 소개됐다. 지인들은 화재사고로 그가 세상을 떠난 줄로 알았다며 연락해 오기도 했다.
3년 뒤 시각장애인문화원 원장에 취임한 그는 "시각 장애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기에 인생의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각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문화생활을 누리면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시민과 시각장애인이 함께 누리는 문화의 장을 만들겠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았던 필자는 함께 역사문화탐방도 다녔다. 그를 통해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을 다시 보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정씨는 2023년 어느날 첫 수필집을 냈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올해 2년 만에 다시 책 출간을 했다. 이 책에는 감상을 위한 곡 해설과 흥미있는 정보들을 많이 담았다. QR코드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바로 유명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음악이 있어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인생 후반기가 보람과 행복으로 가득하다. 그 행복과 즐거움을 널리 알리는 일이 소명이라 다짐한다. 이 책이 마중물이 되어 음악에서 피아노처럼 모두에게 독주이고 협주이며 중주이고 반주이고 싶다"고 말한 그를 생각하며 '손안의 음악감상실'을 맘껏 즐겨야겠다.
천윤자 시민기자kscyj8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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