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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피란민촌의 흔적, 그때 그 사람들]<3> 대구 달성군 하빈면 고계선 씨, 전재민촌의 고단함 비만 오면 잠 들수 없어

2025-12-23 17:00

12살에 대구 달성군 하빈면 봉촌리로 온 고계선 어르신, 힘들었던 정착기
‘집과 땅을 준다’는 약속 속았다는 기분도 들었지만 일어서


22일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봉촌리 경로당에서 고계선 어르신이 1950~1960년대 마을 정착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김현목 기자

22일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봉촌리 경로당에서 고계선 어르신이 1950~1960년대 마을 정착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김현목 기자

"집이라기보다 그냥 뚜껑만 얹은 채 살았지요."


올해 80세에 접어든 고계선 어르신은 12살때 달성군 하빈면 봉촌리로 이사왔다. 지난 22일 마을 경로당에서 만난 고 할머니는 담담하게 지난날을 회상했다.


고 할머니가 전재민촌인 봉천리에 발을 디뎠던 건 60여년 전이다. 당시 봉천리는 강바닥 모래사장 그 자체였다. 제방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는 등 기반시설이 전무했다.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그는 가족과 고령군 우곡면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고 할머니는 "발을 디디면 모래에 푹푹 빠져 걷기도 힘들었다"고 했다.


초창기 주거 환경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다. 집은 콘크리트 없이 블록만 쌓아 올린 방 두 칸과 부엌 하나가 전부였다. 주민들을 가장 힘들게한 건 '비'였다. 고 할머니는 "모래 위에 대충 집을 짓다보니 비가 조금만 와도 구들장 밑에서 물이 스며 올라왔다"며 "겨울이면 송판 벽 틈새로 칼바람이 엄습했다. 전기는 커녕 호롱불 하나에 의지해 긴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정부는 '집과 땅을 무상으로 제공한다'고 했지만 실제 입주 비용을 지불했다. 어르신들 기억에 편차는 있지만 대략 적게는 18만원, 많게는 40만원이 넘는 돈을 냈다고 한다. 당시로선 적지 않은 돈이다. 할머니는 "그 때 우리 아버지가 속은 것 같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평생을 원망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나마 제방 바깥으로 가구당 1천㎡ 남짓 땅이 배정됐다. 초기에는 모래에서 잘 자라는 땅콩을 심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뽕나무를 길러 누에를 쳤고, 농번기엔 인근 마을로 품을 팔러 다녔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이후 제방이 견고해지면서 침수가 줄었단다. 전기와 도로도 차례로 놓였다.1980년대 이후 연 재배가 성행하면서 차츰 소득도 늘어나면서 마을도 자리를 잡아갔다.


고 할머니는 "젊은 사람들은 당시 모습을 상상도 못할 것"이라며 "그래도 여기서 여태껏 아이들 다 키우고 잘 살았다"고 했다.



22일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봉촌리 경로당에서 고계선 어르신이 1950~1960년대 마을 정착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김현목 기자

22일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봉촌리 경로당에서 고계선 어르신이 1950~1960년대 마을 정착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김현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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