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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적토마’처럼 활기찬 기상과 천운이 함께하는 새해

2025-12-25 17:32
작자미상, 유린청, 비단에 채색, 42×35cm, 1447년 안견의 작품을 1705년 모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자미상, '유린청', 비단에 채색, 42×35cm, 1447년 안견의 작품을 1705년 모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붉은 꽃이 괘종의 시계추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새해를 알리는 '게발 선인장' 꽃이다. '불타는 사랑'의 꽃말을 가진 게발 선인장은 우리 집 거실을 밝히는 일출과 함께 핀다. 삐죽빼죽 날카로운 붉은 꽃이 말 갈퀴 같다. 광활한 초원을 누비는 적토마(赤兔馬)랄까. 활기찬 기상과 훤칠한 외모를 가진 말처럼 큰 꽃이 정열적이다.


고속의 상징인 말은 신분이 높은 동물 중 하나다. 예술가에게도 영감을 준 소재로 사랑받았다. 화가들의 마음이 담긴 말 그림을 보며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를 맞는다.


◆이성계의 여덟 마리 애마와 안견의 '유린청'


장수에게 명마는 천운(天運)을 얻는 것과 같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포(呂布)의 '적토마'가 그렇고, 주나라 백락(伯樂)이 알아본 '천리마(千里馬)'가 그렇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에게도 여덟 마리 천운이 있었다. 횡운골(橫雲鶻), 유린청(遊麟靑), 추풍오(追風烏), 발전자(發電赭),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는 적장을 누비며 승전보를 울린 준마들이다.


홍건적을 물리칠 때는 '횡운골'이 이성계를 지켰고, 위화도 회군에는 '응상백'이 큰 활약을 했다. 그 중 가장 큰 공을 세운 '유린청'은 화살을 세 개나 맞으면서 끝까지 싸운 명마였다. 개국공신의 상징인 여덟 마리 준마를 1477년 세종대왕이 화가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하여 공적을 역사에 길이 남겼다.


우리나라에 말 그림이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이다. 고구려고분에 그려진 '마구간'에는 여러 마리의 말을 기르고 훈련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무용총의 '수렵도'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고구려인의 활기찬 기상을 보여준다. 신라 천마총에는 '천마도'가 있듯이 말은 귀족층이 다루던 귀한 존재였다.


'팔준(八駿)'은 주(周)나라 목왕(穆王)의 기상이 뛰어난 여덟 마리 말을 일컫는데, 그가 서왕모(西王母)를 찾아 뵐 때, 팔준마를 몰고 갔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태조는 자신의 애마 여덟 마리 말을 목왕의 팔준마와 견주며 개국의 치세를 굳건하게 했다. 각각의 포즈를 달리한 팔준마를 그린 안견의 '팔준도(八駿圖)'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숙종 대에 다시 그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화가라면 누구나 '팔준도'를 교본 삼아 그렸다.


'팔준도' 중 '유린청'은 신령스러운 기린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세 때부터 31세까지 25년간 이성계의 분신이었다. 유린청이 세상을 떠나자 태조가 슬퍼하며 돌 관을 지어 묻어주었다고 한다. 푸른 빛을 띤 우아한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유린청이 신령스러운 아우라를 풍긴다.


풀밭 위에서 뒷다리를 살짝 들고 옆모습을 취하여 말의 수려한 풍채를 살렸다. 가지런한 갈기가 목선을 타고 흘러내려 잘생긴 얼굴을 돋보이게 한다. 가늘고 길게 빗어내린 풍성한 꼬리는 엉덩이의 뒤태를 아름답게 감싼다. 맑은 눈동자는 충심으로 가득하다.


윤두서, 유하백마도, 비단에 엷은 채색, 34.3×44.3cm, 해남 녹우당 소장

윤두서, '유하백마도', 비단에 엷은 채색, 34.3×44.3cm, 해남 녹우당 소장

◆윤두서의 '백마도'와 이인문의 '준마도'


태조 못지않게 말을 사랑한 선비 화가가 있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다. 말을 잘 그리기로 유명한 그는 여러 종류의 말을 그렸다. 말을 아껴서 타지 않고 감상용으로 길렀다.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하여 말을 수시로 관찰하였다. 끊임없이 스케치를 하면서 말의 습성을 익혔다. 표정과 몸짓, 근육과 살집, 갈기와 꼬리, 말발굽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치중했다. 중국의 유명한 말 그림도 참고하였다.


그의 많은 말 그림 중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가 걸작이다. 고결한 흰색의 말이 버드나무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이 우아하다. 비스듬한 언덕에 잡풀이 피어 있고, 산들바람이 불어 버드나무 이파리가 흩날린다. 바람을 맞으며 뒷다리를 살짝 올리고 옆모습으로 선 백마는 먼 곳을 바라본다. 붉은 고삐는 나무둥치에 매여 있다. 갈색 눈동자를 가진 얼굴이 준수하다. 온순한 자태에 귀티가 흐른다.


이인문, 준마, 종이에 채색, 31.0×41.2cm, 간송미술관 소장

이인문, '준마', 종이에 채색, 31.0×41.2cm, 간송미술관 소장

말 타기는 선비의 여섯 가지 기예(技藝) 중 필수 과목이었다. 수려하고 기상이 뛰어난 말을 가까이 두는 것은 선비들의 로망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성능 좋은 차를 선호하듯 옛 선비들도 명마를 소유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 1745~1824)의 '준마도(駿馬圖)'는 명마가 주인공이다. '한가함 속 청아한 완상'을 의미하는 '한중청상첩(閒中淸賞帖)'에 들어 있다.


'준마도'는 자신의 말을 과시하며 포즈를 잡은 선비들의 모습을 담았다. 말과 함께 선비의 얼굴이 맑다. 표정에는 말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회색에 흰 점이 있는 말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얼굴이 말끔하고 몸체가 유려하다. 주인은 채찍을 쥐고 옆에 있는 선비를 본다. 오른쪽의 말은 연한 갈색의 몸체다. 고개를 든 말 앞에 주인이 고삐를 쥐고 있다.


서로 명필을 자랑하듯 몸짓이 의기양양하다. 왼쪽 위에 '멀리 궁문에 서니 긴 바람이네'라는 화제가 있다. 이는 두보(杜甫, 712~770)의 시 '단청인증조장군패(丹靑引贈曹將軍覇)'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당나라의 조패가 말 그림에 뛰어난 것을 상찬한 시다. 화제를 쓴 간재(艮齋)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이 이인문의 말 그림도 조패에 못지않다고 칭찬한 것이다.


신윤복, 연소답청, 종이에 엷은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연소답청', 종이에 엷은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의 봄나들이 말과 장승업의 '삼준도'


당시 남자들의 우상인 말은 현대의 스포츠카와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사내들의 진심은 예나 지금이나 여성을 사로잡는 것이 아닐까. 지체 높은 양반 자제들이 고급 승용차를 과시하듯 준수한 말을 타고 나타났다. 혈기왕성한 선비들이 '야타족'처럼 어여쁜 기생을 데리고 봄나들이 나선다.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의 '연소답청(年小踏靑)'이다. 귀족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꽃피는 봄날, 아직 날씨는 쌀쌀하다. 어김없이 말을 준비하고, 꽃단장도 마쳤다. 오늘은 선비들이 야유회 가는 날이다. 가슴이 부푼 선비들이 자신의 말에 기생을 태운 채 나들이에 나섰다. 선비들은 가장 유행하는 옷차림에 갖은 멋을 부렸다. 보라색과 연푸른 줄무늬의 누비저고리 아래 향낭을 차고 주머니를 길게 맸다. 두루마기를 걷어 올린 품새가 봄나들이에 어울리는 차림새다.


사내들이 몰고 온 말 위에 트레머리를 한 기생이 담뱃대를 물고 거들먹거린다. 좁은 어깨에 여린 몸짓이 가냘프다. 짧은 저고리에 구름처럼 부픈 치마가 한껏 요염하다. 화면 오른쪽에서 갈색 말을 탄 기생이 초록 장옷을 휘날리며 달려온다. 선비가 빠른 걸음으로 일행에 합류한다. 회색 말을 탄 기생은 선비의 담뱃대를 받으려고 뒤를 돌아본다. 연한 갈색의 말이 앞장서 간다. 말들도 흥이 올랐다. 연신 봄바람이다.


조선 말기, 말 그림의 대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말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그린 '삼준도'는 휘어진 고목 아래 세 마리 말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고목의 둥치는 진한 농담을 살려 기운차다. 버드나무 이파리를 드리워 공간에 변화를 주었다. 앞 말은 정면을 응시하며 기세가 힘차다. 두 번째 말은 왼쪽을 향하며 뛰어가는 자세다. 세 번째 말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각자 자유로운 포즈를 취했다. 다리 근육이 발달되고 몸짓이 날렵한 명마이다. 자유분방한 필치로 역동적인 말을 그린 장승업이 과연 말 그림의 귀재답다.


장승업, 삼준도, 종이에 엷은 채색, 137×55cm, 일본 개인 소장

장승업, '삼준도', 종이에 엷은 채색, 137×55cm, 일본 개인 소장

◆말처럼 달리는 '붉은 말의 해'


말은 인간에게 보배 같은 존재였다. 기마용으로 전장에서 활약하거나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역사와 함께했다. 또 멋드러진 자태로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지금도 스피드의 상징인 말은 자동차 브랜드로 변신해 세계 곳곳을 누빈다. '불타는 사랑'을 안고 적토마가 달려온다. 게발 선인장 붉은 꽃이 폭죽을 터트린다. 힘찬 새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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