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作
백지와 백기
여기서 맘껏 놀고 있어,
엄마가 놓고 간 흰 종이는 언덕도 없이 평평해서 달리다 넘어지기 쉽다 넘어진 김에 긁힌 무릎으로 일기를 쓰다가 잠들 수 있다 이런 곳에 미로가 있어서 손가락을 물고 뚫어지게 쳐다보면 알밤처럼 무섭게 노려보는 곳이 있다 구겨서 내던지거나 찢을 수도 있지만 이미 눈동자가 감옥이다
살금살금 소리가 들려온다 내 귀는 주파수를 알아내려고 가운데로 모인다 산수풀떠들썩팔랑나비가 온갖 향기와 빛의 주인인 것처럼 더 깊숙한 처녀림으로 접어든다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숲을 기대할 수 있는 풍경이 있어서 나는 오솔길을 찾아다닌다 울음이 앙칼진 길고양이의 영역까지 침범하면 뒤돌아 나오고 뒤돌아 나오는 후회가 기본값이다
이곳은 엄마가 없어서 맘껏
걸어도 지평선은 멈추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백지가 도착한다 팔십 년을 걸어서 놀이의 스승을 만날 수 있을까 들어가는 문이 있어서 들어가면 나가는 문을 만들어야 하는 목수가 되어 있다 방향이 없다 쌀 씻는 소리가 들리는데 저녁이 없다 창문이 보이는데 창문 안에 가정이 없다
나침반 이전의 들판에서 나는 사탕 몇 알 훔치다 붙잡힌 아이가 되어 손톱을 물어뜯는다 마디 없는 흰 손이 부끄러워서 눈을 내리깔지만 이미 설맹을 앓는다 뺨을 맞지도 않았는데 하얗게 질려서 가장 자신 있게 백기를 들어 올리고 싶다
이 네모의 링을 손수건처럼 흔들고 싶다
0도의 평면을 걸어 나오는 점이 보인다 나는 구조되는 중인가 이곳은 엄마가 없어서 나는 엄마가 아니다 나는 사방에 노출되어 있어서 어느 쪽으로 서 있어도 반성이 결말인데 0도의 평면을 걸어오는 점이 점점 홀쭉해진다 나에게 다가오는 홀쭉한 점이 내 발을 끌어당기려 해서 넘어질 것 같다 내 그림자 때문에 나는 뫼비우스의 띠로 여태 노는 중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