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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영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낙수(落水)

2026-01-02 06:00
유주희 作

유주희 作

낙수(落水)



1


비가 올 것이다. 무릎이 먼저 알았다. 오른쪽 무릎 연골 틈새로 눅눅한 습기가 파고들었다. 이는 통증이 아닌 뼈마디 사이에 녹슨 쇠가 끼어 삐걱거리는 감각에 가까웠다. 정수는 트럭 대시보드에 발을 올리고 관절을 문질렀다. 류마티스. 의사는 면역 체계가 제 몸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하는 병이라고 했다.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는 스스로를 공격하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K시 톨게이트를 통과하자 회색빛 안개가 트럭 앞 유리를 덮쳤다. 와이퍼가 뻑뻑한 소리를 내며 안개를 걷어냈다. 텅 빈 4차선 도로 양옆으로 잡초가 무성한 가드레일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신호등은 모두 꺼져 있었고, 전광판에는 붉은색 글씨로 진입 금지라는 문구가 죽은 픽셀처럼 박혀 있었다. 정수의 트럭 짐칸에는 몽키 스패너, 파이프 렌치, 절단기, 그리고 수백 개의 수도 계량기 뚜껑이 실려 있었다. 그는 수도국 공무원이 아니었다. 국가는 이미 이 도시에 공무원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는 하청업체 대성설비의 계약직 팀장이었다. 그의 임무는 간단했다. 죽은 도시의 혈관을 하나씩 찾아내 결찰하는 것. 더 이상 피가 돌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가 맡은 도시의 장례 절차였다.


"3구역 104동. 메인 밸브 차단 확인."


정수는 무전기를 들지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트럭을 104동 입구에 세웠다. 15년 된 복도식 아파트. 외벽의 페인트는 습진처럼 벗겨져 나갔고, 베란다 창문들은 검은 눈 구멍처럼 뻥 뚫려 있었다.


[2031년 10월 21일 / 속보]


행정안전부, 인구 10만 선 붕괴된 K시에 '행정 폐쇄' 조치 단행. 오는 11월 1일부터 전기·수도 공급 전면 중단. 잔류 주민 강제 퇴거 집행 예고.


발 아래 신문 1면이 나뒹굴었다. 40년 전에는 인구 200만이 살던 곳이었다. 나름 도시 순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는데. 종말은 가장 낮은 데서부터 시작했다. 차 문을 열자 비릿한 흙냄새와 시멘트 가루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정수는 공구 가방을 메고 지하실로 향했다. 무릎이 욱신거렸다. 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폭우 속에 있었다. 지하실은 어둡고 축축했다. 발밑에서 쥐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정수는 헤드랜턴을 켰다. 먼지 속에 하얗게 드러난 배관들이 얽혀 있었다. 100㎜ 주철관. 이 아파트 단지의 대동맥이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배관에 귀를 댔다.


웅웅- 배관이 울고 있었다. 오래된 배관공들은 수맥이 떤다고 표현했다. 흐름이 막힌 물이 갈 곳을 잃고 관벽을 때리는 미세한 진동. 하지만 정수에게 그 소리는 비명처럼 들렸다. 그는 10년 전, 맨홀 아래에서 들었던 동료의 마지막 숨소리를 기억했다. 규정대로 밸브를 잠갔더라면 살았을지도 모르는, 혹은 규정을 어겨서 죽었던가. 기억은 무릎 통증처럼 흐릿하고 끈질겼다. 그는 고개를 저어 이명을 떨쳐냈다.


"1204호."


단말기 액정에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였다. 모든 세대의 계량기는 0이어야 했다. 사람은 떠났고, 수도는 끊겼으니까. 하지만 단말기는 1204호에서 지속적인 유량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동파된 파이프에서 물이 새거나, 낡은 패킹이 삭아서 물이 줄줄 흐르는 경우. 정수는 보고서에 누수 확인 및 차단이라고 적기 위해 12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멈춘 지 오래였다. 그는 계단을 오르며 숫자를 셌다. 한 층을 오를 때마다 무릎 안쪽에서 날카로운 바늘이 찌르는 듯했다. 4층, 5층, 6층… 땀이 방진복 안으로 흘러내렸다.


12층 복도에 도착했을 때, 정수는 숨을 골랐다. 복도 끝, 1204호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기이한 것은 문 앞에 쌓인 먼지였다. 다른 집 앞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발자국이 없었지만, 1204호 앞 복도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흔적이 있었다. 바퀴 자국 같기도 했고, 무언가 질질 끌려간 자국 같기도 했다. 정수는 양수기함 덮개를 열었다. 랜턴 불빛이 계량기를 비췄다. 정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타닥, 타닥, 파란색 별침이 돌고 있었고 단순히 물이 새는 속도를 넘어섰다. 누수라면 별침은 불규칙하게 떨거나 천천히 돌아야 했다. 하지만 저것은 맹렬했다. 누군가 욕조의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어놓은 것처럼, 혹은 목마른 짐승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처럼, 별침은 일정한 리듬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살아 있다. 죽은 도시의 심장부에서, 누군가 막대한 양의 물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 소리는 마치 여기를 봐, 여기 고장 난 게 있어, 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정수는 직업적으로 망가진 것을 견디지 못했다. 비틀어진 나사, 헐거운 이음새,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흐름. 정수는 양수기함을 닫지 않았다. 대신 1204호의 도어락을 바라봤다. 배터리가 방전되어 먹통이 된 전자키. 그는 공구 가방에서 가장 큰 일자 드라이버와 망치를 꺼냈다.


쾅, 쾅. 두 번의 타격음이 텅 빈 복도에 공명했다. 도어락이 부서져 나갔다. 철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조금 열렸다. 문틈 사이로, 비릿한 짐승의 냄새와 함께 축축하고 더운 공기가 훅 끼쳐 나왔다. 사람 사는 집이라기보다 거대한 짐승의 뱃속 냄새였다. 정수는 무릎의 통증을 잊은 채, 천천히 문을 밀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을 넘어서자마자 코를 찌른 것은 썩어가는 단백질 냄새였다. 음식물 쓰레기의 악취와는 달랐다. 짐승의 배설물, 마르지 않은 핏물, 그리고 털 젖은 개 비린내가 고온다습한 공기 속에 뒤엉켜 있었다. 정수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폐허가 된 도시의 모든 악취가 이 1204호로 흘러들어 고여 있는 것만 같았다.


거실은 더 이상 거실이 아닌 수준이었는데, 베란다 확장을 위해 뜯어낸 내력벽의 철근이 흉골처럼 드러나 있었다. 그 아래, 거실 한복판에는 성인 허리 높이의 철제 펜스가 둥그렇게 설치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방수포가 깔려 있었지만, 곳곳에 검붉은 얼룩이 지도처럼 번져 있었다. 정수는 단박에 이곳의 용도를 알아챘다.


투견장.


"누구야."


어둠 속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정수는 랜턴 불빛을 소리 나는 쪽으로 돌렸다. 베란다 창가 쪽에 층층이 쌓인 철창 케이지들이 보였다. 좁은 철창 안에는 덩치 큰 도사견과 핏불테리어들이 구겨지듯 엎드려 있었다. 녀석들은 짖지 않았다. 성대 수술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짖을 기력조차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탁한 눈알을 굴려 불빛을 쫓을 뿐이었다.


케이지 옆, 간이침대도 없는 맨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일어섰다. 소년이었다. 열서너 살쯤 되었을까. 헐렁한 트레이닝복은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때에 절어 있었다. 떡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케이지 안의 개들과 똑같았다. 경계심과 체념이 뒤섞인, 먹이 사슬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의 눈이었다. 소년의 오른손에는 깨진 욕실 타일 조각이 들려 있었다. 날카로운 단면이 정수의 목덜미를 겨냥했다. 정수는 공구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놓지 않은 채, 소년의 손과 타일, 그리고 뒤편의 수도 배관을 차례로 훑었다.


"수도국에서 왔나요?"


소년이 타일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소년 등 뒤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는 파이프에 꽂혀 있었다. 물 새는 소리가 정수의 고막을 긁었다. 무릎의 통증이 그 소리에 맞춰 욱신거렸다. 정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타일을 든 소년보다, 저 망가진 배관이 더 신경 쓰였다. 마감이 엉망이군. 저러니 수압이 떨어지지. 정수는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소년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타일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지 마세요. 찌를 거야."


"시끄러워."


정수는 건조하게 내뱉었다. 그는 소년을 무시하고 배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소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찌르기엔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도망치기엔 뒤가 막혀 있었다. 정수는 소년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소년은 엉거주춤하게 벽으로 밀려났다. 정수는 물바다가 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공구 가방을 열었다. 금속끼리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났다. 소년이 숨을 들이켰다. 무기라도 꺼내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수의 손에 들린 것은 12인치 파이프 렌치였다.


그는 호스가 연결된 밸브의 너트를 렌치로 물렸다. 손목에 힘을 주어 꽉 조였다. 헐거웠던 이음새가 맞물리며 비명 같은 금속음을 냈다. 이내 솟구치던 물줄기가 잦아들더니, 뚝 그쳤다. 고요가 찾아왔다. 정수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장갑 낀 손으로 쓱 닦아냈다. 그제야 소음이 사라진 공간의 다른 소리들이 들려왔다. 개들의 거친 숨소리. 빗물이 창문을 때리기 시작하는 소리. 그리고 등 뒤에서 들리는 소년의 불규칙한 호흡. 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갑을 털었다. 소년은 여전히 타일을 들고 있었지만, 겨누는 방향을 잃은 채 멍하니 정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침입자가 도둑이나 경찰이 도 아닌 고작 배관을 고치러 온 기술자라는 사실을 이해하려했다. 정수의 시선이 소년의 왼손에 머물렀다. 거기에는 흠뻑 젖은 회색 헝겊이 들려 있었다. 바닥에는 검은 플라스틱 대야가 놓여 있었는데, 받아놓은 물이 반쯤 차 있었다. 소년은 그 물을 아껴 쓰기 위해 호스로 뿌리는 대신, 헝겊에 물을 적셔 개들을 닦이고 있었던 것이다.


투견 한 마리가 철창 사이로 코를 내밀었다. 몸통 곳곳에 찢기고 꿰맨 흉터가 가득한 핏불이었다. 소년은 정수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반사적으로 젖은 헝겊을 들어 개의 상처 부위를 닦아냈다. 열을 식혀주려는 것인지, 핏자국을 지우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 한 방울이 아까운 동작이었다. 정수는 그 모습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곳은 물을 훔치는 곳이었다. 계량기가 미친 듯이 돌아갈 만큼 물을 착취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물을 관리하는 말단 노동자인 소년은 물을 신성한 약물처럼 다루고 있었다.


"물이 새고 있었어."


정수가 처음으로 소년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소년은 타일을 슬그머니 등 뒤로 감췄다.


"알아요. 하지만 연장이 없어서…"


소년의 목소리는 변성기를 지나고 있었다. 거칠고 낮았지만, 독기는 빠져 있었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사장님이 보냈어요?"


"아니."


정수는 발을 떼지 못했다. 소년이 닦아주던 개의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 눈은 10년 전, 정수가 구조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수해 현장의 어떤 눈빛과 닮아 있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죽음을 지켜봐 달라고 말하는, 체념보다 깊은 고요가 담긴 눈이었다.


"비 그칠 때까지만 있다 가자."



2


비는 세상을 지우개로 문지르듯 K시의 풍경을 지워버렸다. 창밖은 거대한 수족관 같았다. 12층 높이의 허공에서 물이 쏟아지기 보단 아파트 전체가 물속에 잠겨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정수는 벽에 등을 기댔다. 오른쪽 무릎의 욱신거림이 심장 박동에 맞춰 징, 징, 울렸다. 기압골이 통증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정수는 손목시계를 봤다. 오후 2시였지만 실내는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트럭으로 돌아가기엔 늦었다. 도로의 배수구가 막혔을 것이고, 흙탕물이 바퀴를 삼켰을 것이다. 이 비가 잦아들 때까지, 혹은 누군가 들이닥칠 때까지 이 밀실에 고립된 셈이었다.


정수는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뜨거운 물이 면 위로 쏟아지는 소리가 나자, 케이지 안의 개들마저 킁킁거리며 코를 벌름거렸다. 인스턴트 특유의 자극적인 냄새가 짐승의 누린내를 덮었다. 정수는 나무젓가락을 쪼개 컵라면 하나를 제 앞에 놓고, 다른 하나에는 물을 부어 바닥으로 툭 밀었다. 플라스틱 용기가 장판 위를 미끄러져 소년의 발 앞에서 멈췄다.


"먹어."


소년은 정수의 얼굴과 컵라면을 번갈아 봤다. 의심은 짧았다. 소년은 엉금엉금 기어와 컵라면을 낚아챘다. 3분을 기다릴 인내심 따위는 없었다. 소년은 덜 익은 면발을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정적 속에서 면을 빨아들이는 소리만 요란했다. 정수는 천천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국물은 짰고, 면은 뚝뚝 끊어졌다. 그는 라면을 먹으며 소년을 관찰했다. 소년은 씹지도 않고 삼키면서도, 왼손으로는 컵라면 용기를 단단히 감싸 쥐고 있었다.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정수는 목이 메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소년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들이켰다. 그리고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정수의 눈치를 살폈다.


"더 줄까?"


정수가 묻자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배가 불러서기 보다 더 요구했다가 이 기묘한 호의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눈치였다.


그때였다. 끼이잉… 끙. 가장 안쪽 케이지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등 가죽이 찢어져 꿰맨 자국이 있는 핏불테리어였다. 녀석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습기가 상처를 파고드는 모양이었다. 비가 오면 뼈마디가 쑤시는 정수처럼, 녀석도 비가 오면 찢긴 살점이 쑤시는 것이리라. 소년이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철창 사이로 손을 넣어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아, 킹. 조금만 참아."


소년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까 정수가 물을 잠가준 덕분에 남은 깨끗한 물을 손가락에 찍어 개의 코끝에 발라주는 것뿐이었다. 정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신의 조끼 주머니를 뒤졌다. 은박 포장에 든 알약. 덱시부프로펜. 강력한 소염진통제였다. 그는 하루에 두 알씩 먹어야 버틸 수 있었다.


"야."


정수가 알약 하나를 꺼내 던졌다. 하얀 알약이 소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이게 뭐예요?"


"진통제. 사람 먹는 거니까, 개한테도 들을 지도 몰라."


"하지만…"


"어짜피 그 상태면 일주일 안에 죽어"


소년은 알약을 집어 들고 잠시 망설였다. 독약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보다, 당장 개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소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숟가락 뒷면으로 알약을 곱게 으깼다. 그리고 컵라면 용기에 남은 미지근한 물을 조금 부어 가루를 녹였다. 정수는 다시 벽에 머리를 기댔다. 무릎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약을 먹은 건 개인데, 진통 효과는 정수에게 오는 것 같았다.


"고치는 사람이네요."


한참 만에 소년이 입을 열었다.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정수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뭐?"


"보통 어른들은 여기 오면 부수거나, 때리거나, 뺏어가거든요. 근데 아저씨는 고치고, 약도 주고…"


소년은 말끝을 흐리며 텅 빈 라면 용기를 만지작거렸다. 정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치는 사람. 딱히 틀린 말 없었지만 정수는 알고 있었다. 고치는 사람이라기보다 마감하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 쓸모없어진 것들을 폐기 처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확인 도장을 찍으러 다니는 사람.


"착각하지 마라. 난 끊으러 온 거야."


정수는 차갑게 대꾸했다.


"여기 수도, 내가 잠그면 너랑 저 개들은 말라 죽어."


"알아요."


소년은 담담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 죽을 텐데요, 뭐."


"내일?"


"사장님들이 온댔어요. 내일 큰 경기가 있다고. 킹은… 이번에 지면 없애기로 했어요."


소년의 시선이 잠든 개에게 머물렀다. 소년은 자신의 운명도 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개가 죽으면, 개를 돌보던 소년도 필요 없어질 테니까. 정수는 시선을 돌려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문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10년 전, 박 씨를 맨홀에 두고 밸브를 잠가야 했던 그날의 얼굴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도 비가 왔고, 그때도 그는 매뉴얼을 지켰다. 살아남은 것은 자랑보다 수치였다.



유주희 作

유주희 作

3


쿵-


그때, 아파트 1층 현관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천둥이나 번개가 아닌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엔진의 공회전 소리. 소년이 속삭였다. 내일 온다던 포식자들이, 비 냄새를 맡고 일찍 도착한 것이다. 정수는 반사적으로 렌치를 집어 들었다. 무릎의 통증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숨어요."


정수가 짧게 내뱉었다. 소년은 얼어붙어 있었다. 1층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고, 삐빅 소리가 환청처럼 12층까지 기어 올라왔다. 정수는 소년의 멱살을 잡아채 욕실 옆 보일러실로 밀어 넣으려다 멈췄다. 소년이 들어가면 개들은 누가 지키나. 소년은 죽어도 개들 곁을 떠나지 않을 태세였다. 정수는 방향을 틀었다. 자신이 숨어야 했다. 그는 베란다 끝, 낡은 붙박이장 형태의 보일러실 문을 열고 몸을 구겨 넣었다. 다행히 10년 전 모델인 가스 보일러 뒤쪽에는 성인 한 명이 웅크릴 만한 틈이 있었다. 곰팡이 냄새와 녹슨 쇠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문을 닫되, 손가락 한 마디만큼 틈을 남겨두었다. 시야 확보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질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쿵, 쿵, 쿵. 군화 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세 명, 아니 네 명. 철문이 벌컥 열렸다. 비 냄새와 함께 담배 냄새, 그리고 진한 남자 스킨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


"아따, 날씨 한번 지랄 같네."


걸걸한 목소리의 사내가 빗물을 털며 들어왔다. 검은색 우비를 입은 사내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바닥에 고인 물이 튀어 소년의 얼굴로 튀었다. 소년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야, 준비는 다 됐냐?"


사내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젖은 우비를 벗어 소년에게 던졌다. 척, 하고 무거운 비닐이 소년의 머리를 덮었다.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우비를 받아 들고 구석에 개켰다.


"킹 상태가 왜 이래? 눈깔이 풀렸는데?"


케이지를 들여다보던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쇠창살을 발로 찼다. 쾅! 개들이 화들짝 놀라 짖기 시작했다.


"조용히 안 시켜?"


우두머리가 소년의 배를 걷어찼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이 물웅덩이 위로 엎어졌다. 흙탕물이 튀어 소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년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바닥을 기어가 케이지를 감쌌다.


"오늘 VIP들 오시는데 개가 비실거리면 네가 대신 링에 올라가는 거야. 알았어?"


사내는 킬킬거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보일러실 틈새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정수의 손이 떨렸다. 10년 전, 수해 복구 현장에서 보았던 공무원들의 표정이 사내들의 얼굴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을 처리해야 할 폐기물로 취급했다. 그리고 지금, 저 사내들은 살아 있는 소년을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정수의 시선이 보일러실 벽면에 붙은 배관으로 향했다. 15㎜ 엑셀 파이프. 낡아서 표면이 경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옥상 물탱크와 직결된 붉은색 감압 밸브가 보였다.


현재 수압 2.5kgf/㎠. 가정용으로 적정 수준이었다. 하지만 옥상 물탱크의 낙차를 이용하면… 정수는 눈을 감았다. 그냥 있으면 산다. 저들이 개싸움을 붙이고 돈을 챙겨 떠날 때까지 숨 죽이고 있으면, 그는 무사히 퇴근해서 따뜻한 방에 누울 수 있다. 소년? 어차피 내가 구할 수 없는 인생이다. 내일이면 철거될 운명이다. 하지만 귓가에 맴도는 소리가 그를 괴롭혔다. 소년이 컵라면을 허겁지겁 삼키던 소리. 개를 닦아주던 젖은 헝겊이 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지금, 엎어진 소년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억눌린 신음 소리.


배관이 다시 울었고, 일반적인 공명음이 아니었다. 정수의 심장 소리였다. 정수는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체념한 기술자를 넘어섰다. 정수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좁은 공간에서 몽키 스패너를 꺼내 감압 밸브의 조절 나사에 끼웠다. 손목이 시큰거렸지만 힘을 주었다. 미세한 금속음. 사내들의 웃음소리에 묻혔다. 정수는 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수압 상승. 2.5… 3.0… 4.0… 바늘이 붉은색 위험 구간을 향해 치솟았다. 낡은 배관들이 팽창하며 틱, 틱, 비명을 질렀다.


"뭐야? 무슨 소리야?"


담배를 피우던 사내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 속 배관들이 춤을 추듯 요동치고 있었다. 벽지 위로 물길 같은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정수는 마지막으로 보일러실과 연결된 메인 배관의 이음새를 렌치로 물렸다. 이 너트를 풀면, 압력을 견디지 못한 물이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 터져 나올 것이다. 정수는 숨을 들이켰다. 소년의 멍든 눈과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그는 힘껏 렌치를 제쳤다. 아파트가 비명을 질렀다. 1204호의 천장 텍스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압축되어 있던 공기와 함께, 10년 동안 배관 속에 갇혀 있던 녹물과 고압의 수돗물이 폭발하듯 쏟아져 내렸다.


"아악! 뭐야!"


"눈! 내 눈!"


뜨겁지는 않았지만 고압의 물줄기는 살이 벗겨질 만큼 매서웠다. 시야가 차단된 거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내들은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며 비틀거렸다. 바닥은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 흙탕물 늪이 되었다. 보일러실 문을 박차고 나온 정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몽키 스패너를 쥔 채 사내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누군가의 어깨에 부딪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출구, 그리고 소년이었다. 소년은 구석에서 머리를 감싸고 떨고 있었다. 정수는 소년의 멱살을 잡는 대신, 쥐고 있던 몽키 스패너를 소년의 발치에 던졌다. 묵직한 쇠뭉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졌다.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물에 젖은 정수의 얼굴이 보였다. 정수는 물소리에 묻혀 입모양으로만 외쳤다.


'살아라.'


정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열린 현관문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잡아! 저 새끼 잡아!"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지만, 곧이어 와장창 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개들이 맹렬하게 짖는 소리에 묻혔다. 아마도 소년이 스패너로 케이지의 자물쇠를 부쉈거나, 누군가의 머리통을 가격했을 것이다. 정수는 비상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무릎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통증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등 뒤로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가 끈질기게 따라왔다. 죽은 도시가 토해내는 거대한 울음.


비는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굵어진 빗줄기가 트럭의 앞유리를 때리고 있었다. 정수는 엑셀을 밟은 발목을 떨었다.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간 자리에 지독한 통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무릎, 허리, 손목. 성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 멈추면 영영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다.



4


K시 톨게이트가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났다. 평소라면 하이패스로 통과했을 구간이었지만, 지금은 무장한 군인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검문 중이었다. 정수는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습기가 땀에 젖은 얼굴을 식혔다.


"정지. 시동 끄세요."


방독면 같은 마스크를 쓴 군인이 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트럭 짐칸의 공구들과 흙탕물 범벅이 된 정수의 작업복을 훑었다. 의심이라기보다는 절차상의 확인이었다.


"작업 시간이 초과되었습니다. 예정보다 두 시간 늦으셨네요."


"배관이 낡아서 애를 좀 먹었소."


정수는 목을 가다듬었다. 쇳가루를 삼킨 듯 목소리가 걸걸했다.


"104동 쪽은 이제 물 한 방울 안 나올 거요. 완전히 잠갔으니까."


군인은 작업 일지를 내밀었다. 정수는 볼펜을 쥐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려 글씨가 삐뚤어졌다.


'작업 완료.'


"내부에 잔류 인원은요? 특이사항 없습니까?"


군인의 질문에 정수는 룸미러를 힐끔거렸다. 회색빛 안개에 잠긴 4차선 도로. 그 너머로 보이는 죽은 도시의 실루엣. 그는 1204호에서 보았던 소년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발로 차서 밀어주었던 몽키 스패너의 무게감을 손바닥으로 다시 느꼈다.


"……"


정수는 쥐고 있던 핸들에 힘을 주었다. 손톱 밑에 낀 검은 기름때가 선명했다.


"없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 없더군요."


"확인했습니다. 통과하세요."


바리케이드가 열렸다. 군인이 경례를 붙였다. 정수는 답례 없이 기어를 넣었다. 트럭이 덜컹거리며 톨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도시의 경계선을 넘는 순간, 정수는 다시 룸미러를 봤다. 안개가 바람에 밀려 잠시 걷힌 틈으로, 톨게이트 옆 갓길의 숲으로 이어지는 철조망 개구멍이 보였다. 그곳에 그림자가 있었다.


작은 그림자와, 그보다 더 낮은 자세로 걷는 네 발 짐승의 그림자. 소년이었다. 소년은 찢어진 우비를 걸친 채 절뚝거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붕대를 감은 듯한 핏불테리어 한 마리가 보폭을 맞춰 걷고 있었다. 소년의 한쪽 손에는 묵직한 쇠붙이가 들려 있었다. 정수의 스패너였다. 이제 배관을 고치는 것이 아닌, 세상을 향해 휘두를 수 있는 무기로 말이다.


정수는 조수석 시트 위를 더듬었다. 반쯤 마시다 남은 미지근한 생수병이 손에 잡혔다.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조수석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타이어가 빗물을 튀기는 소음이 차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가 무심하게 던진 생수병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갓길의 풀숲 근처 아스팔트에 떨어졌다. 소년이 그 병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수는 다시 창문을 올렸다. 백미러 속의 그림자들은 다시 몰려온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정수는 라디오를 켰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기상 캐스터의 명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일은 전국에 많은 비가 내리겠습니다. 특히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정수는 젖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내일도 비가 온다. 적어도 목말라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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