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5개월, 선천성 백내장 수술 후유증으로 수정체 없어, 한계를 극복한 청년작가
“전시 빌려오는 구조 반복, 지역 미술 생태계 더는 못 큰다”
“예술회관만으론 한계…구미시립미술관은 ‘연구기관’으로 가야”
구미시 선산읍 작업실에서 만난 이겨레 작가<박진관 기자>
이겨레 작가가 근대 구상회화 작가들을 표현한 'Figurative'. 얼굴로는 누구인지 알수 없지만, 자세와 행동으로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표현했다. <박용기 기자>
생후 5개월, 선천성 백내장 수술 후유증으로 수정체가 없어 초점이 잘 맞지 않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작품 속 인물의 얼굴은 흐릿하게 처리돼 있다. 글을 읽고 이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돋보기와 쌍안경을 번갈아 사용해야 한다.
경북 구미시 출신으로 선산읍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는 이겨레(38)작가 이야기다. 구미 금오중학교와 김천예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서양화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이 작가는 서울대 대학원(서양화 전공)을 졸업한 후 2017년~2018년 독일 라이프치히 국제 시각예술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서울과 울산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9년 고향 구미로 내려와 선산읍에 자신의 작업실을 마련했다. 지난해 11월 구미청년작가전, 12월에는 구미아트페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 작가는 대상을 빨리 인식하지 못하는 신체적인 한계보다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판단되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임의의 인물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두려움과 긴장감 등 심리적인 한계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그는 "작업 초기 내게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가장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는 대상인 인물을 소재로 나의 시각으로 실제로 대상이 보이는 모습을 그림을 통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했다"며 "그리고 점차 물리적·심리적인 한계상황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 결과 시력이 약해 얼굴을 또렷이 인지하기 어려운 경험이 회화적 표현으로 이어진 것도 있지만, 단순한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주인공이 특정인으로 고정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재난·사고를 자신만의 작품 세계로 해석해 표현하기도 했다. 2014년 16명이 사망한 판교 환풍구 사고를 표현한 'ground' 작품 이후 사회적 사건을 다룰 때는 주로 상황을 다시 직접 연출해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지역 미술계로부터 건립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구미시립미술관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밝혔다. 이 작가는 "구미문화예술회관 전시실이 있는데 굳이 시립미술관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며 "문화예술회관과 시립미술관은 성격이 다르다. 예술회관이 '종합예술·대관 중심'이라면, 시립미술관은 연구·기획·수장·교육이 분업화된 '독립 연구기관'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지역 미술 인프라 확충의 중심은 전문적인 시스템 구축"이라며 "구미는 동시대 미술을 소개하고 지역 작가를 깊이 있게 연구할 전문 시스템이 부족하다. 시립미술관을 건립한다면 단순 전시장이 아니라 지역 미술을 이해하고 기획할 능력과 인력, 공간을 갖춘 전문적이고 분업화 된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시립미술관이 설립되더라도 운영 주체와 인사 구조가 과거 방식의 연장선이면 공간만 하나 더 생기는 결과가 될 뿐이다. 기대했던 변화가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 구미에 부족한 것은 인정하고, 외부 인력과 전문성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했다. 구미시는 현재 시립미술관 필요성에 공감하며 건립 위치와 예산 등을 검토 중이다.
이 작가는 올해 3월 서울 성동구 뚝섬역 인근 전시공간에서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근대 구상회화 작가들을 한 장면에 불러내 '가상의 상황'을 구성하는 연작을 선보일 계획이다. 동시에 사회적 사건·사고의 흔적을 회화로 재해석하는 작업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역사만 말하기보다 동시대에 눈 감지 않는 것이 작가의 의무처럼 남아 있다"고 말했다.
박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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