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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뒤 친구의 딸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딸아이가 한국 나이로 일곱살이 되는 해였다.(독일의 초등학교는 한국보다 1년 일찍 시작한다.) 친구는 입학식에 딸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또 다시 놀라운 경험을 했다. 교과서가 헌책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헌책인데도 불구하고 새 책처럼 깨끗하다는데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러나 그 놀라움을 이해하는 데는 불과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무상배급으로 나누어 준 책에 첨부된 공문에 그 이유가 상세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문은 알림이라기보다 명령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책은 여러분 자녀의 후배가 다시 사용할 책이오니, 책이 상하거나 더럽혀지지 않도록 책을 깨끗이 포장해 주시고, 책에 낙서를 하거나 밑줄을 긋지 않도록 지도해 주시고, 책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책가방을 늘 청결하게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학생으로 하여금 항상 손을 씻고 책을 보도록 가르쳐주십시오.’ 거의 명령조인 이 내용은 ‘후배가 물려받을 책이니 깨끗이 사용하라’는 것으로 압축됐다.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나의 기억여행은 초등학교 시절로 달려갔다. 우리에게도 지나간 달력으로 책을 싸던 시절이 있었지. 지나간 달력을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가 학년 초에 책을 받아오면 으레 그 달력으로 책을 포장하면서 학년을 시작했는데…. 그리고 그 책을 후배에게 물려주기도 했는데….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 책을 포장하지 않았지. 그리고 책을 마구 사용하기 시작했지. 신성하기까지 했던 책의 지위는 이제 한 번 보고 버리는 소비재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생각하면, 우리의 자녀가 휴지보다 못한 교과서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젠가 ‘아직은 절약할 때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커다란 플래카드가 은행 벽에 걸린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아직은’이라는 부사가 몹시 신경에 거슬렸는데, 이제는 그 문구를 그보다 더 씁쓸한 심정으로 다시 바꾸어야겠다. ‘아직은 소비할 때가 아닙니다.’
임진수<계명대 유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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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기억여행⑸](https://www.yeongnam.com/mnt/file/201202/20120202.01019072327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