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네온처럼 반짝이는 형형색색의 물고기…그리고 미역·다시마·모자반·감태…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생명을 품은 바다의 숲](https://www.yeongnam.com/mnt/file/201211/20121116.010380756220001i1.jpg) |
상모리 해안의 평화 소공원에서 해녀 탈의장이 있는 방파제로 나아가는 길. |
바다는 오른쪽에 바짝 붙어서 꼭 영원히 함께 갈 것처럼 따라왔다. 운전을 할 때는 몰랐는데, 느긋이 조수석에 앉아 속도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바다를 바라보니, 한 마리 돌고래처럼 바닷속을 달리는 듯했다. “여기!” 들과 바다 사이를 가르는 하얀 도로에서 멈추었다. “뭐 이래! 뭐가 이래 좋아!” 그런 바다였다.
◆대정 상모리 해안, 평화의 공원
이곳은 제주 최남단의 해안도로. 올레길도 슬쩍 비껴가는 한적하기 그지없는 상모리 해안이다. 검은 해안에는 파도의 흰 포말이 레이스 자국을 남기고,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방파제엔 배 한 척 없다. 모두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사람 같구나. 커다랗고 텅 빈 건물 하나가 방파제 앞에 서있다. 해녀들의 탈의장이라는데 간소한 먹거리를 팔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걸어 잠긴 문. 쓸쓸하게 남겨진, 주모 떠난 주막 같다.
바닷가에는 나선형의 조형물, 뼈대 약한 그늘막, 제주 할망을 상징한다는 바위들이 툭툭 놓여 있다. 이곳이 2010년 태평양지역 7개국 대학생 28명이 만들어 낸 환태평양 평화의 소공원 ‘태평양의 징검다리’다. 환태평양 주변 도시들 간의 경계 없는 공동체를 기원하는 공원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미국의 샌디에이고, 중국의 옌타이, 멕시코의 티주아나, 필리핀의 팔라완섬에 이어 6번째로 만들어졌다.
지난여름의 태풍 탓인지 자연스러운 시간 탓인지, 공원은 오래된 폐허처럼 아름답게 헐벗었다. 현대적으로 해석한 평화의 방사탑만이 하늘과 바다를 등지고 뿌듯하게 서있다.
방파제의 끝으로 간다.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 하나 둘. 누군가 올라올 것만 같은데 눈이 어린다. 무엇인가 비오는 날의 네온처럼 물속에서 반짝거린다. 물고기들이다. 크고 작은 색색의 물고기들이 윤슬에 몸을 숨기고 떼 지어 유영한다. 바다 숲이다. 상모리 해역에는 바다숲이 조성되어 있다. 산업화와 지구온난화로 훼손된 연안에 미역, 다시마, 모자반, 감태와 같은 유용한 해조류가 서식할 수 있도록 생태 환경을 만든 것이다.
“우리만 알자.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이런 ‘우리’가 얼마나 많을까. 바다의 숲, 이곳에서 얼마 전 바다 올레가 열렸다. 한 떼의 다이버가 우르르 버스에서 내린다. 이제 오늘과 같은 황금의 고요는 드물지도 모르겠다.
다시 달린다. 상모리의 들녘 너머로 오름의 부드러운 실루엣이 천천히 지나간다. 6·25전쟁 당시 양민들이 학살된 땅, 가미카제 대원들이 죽음을 향해 훈련받던 땅이 저곳이다. 그 흔적들을 고스란히 안은 섯알오름을 등 뒤에 두고 동쪽으로 달린다.
◆강정마을 중덕 해안
‘강정 간다’ 하면 시만 읊을 줄 알았지, 이 작고 평범하고 아름다운 마을을 먼저 떠올리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강정은 많이 변해 있다. 처음 올레가 만들어졌을 즈음, 그중에서도 제일 좋다고 소문난 7코스를 혼자 걸었었다. 강정은 그 길에 있었다. 마을의 하우스에서는 꽃이 피어있었고, 돌담엔 귤이 척 올라앉았고, 마을의 중덕 해안엔 구럼비 바위가 떡하니 펼쳐져 군데군데 습지가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아주 평범한 제주의 마을 중 하나, 그것이 강정이었다.
강정포구의 방파제를 걷는 걸음소리, 또각 또각 선명하다. 봉고형 경찰차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널브러져 있던 두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마주치는 시선이 맵지는 않지만 습관이 된 의무의 주시가 있다.
방파제 끝에 서면 육지의 먼 가운데 한라산이 희미하게 서있다. 그 모습이 아주 완만하게 커서 외유내강했던 선조나 전설 속의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 아래 강정마을이 깃털 빠진 새처럼 앉아있다. 방파제는 마을의 전체를 조망하기에 좋은 장소다. 또한 환하고 선명하고 희고 높은 벽으로 둘러쳐진 해군기지 공사현장을 직시하게 되는 장소다. 중덕해안을 이루던 구럼비바위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구럼비는 ‘까마귀쪽나무’를 뜻하는 제주도의 방언이다. 이 나무는 남해안의 섬에서 자생하는 늘 푸른 작은 키의 나무다. 제주도는 대부분의 해안이 바위로 형성되어 있고, 그 바위 가까이 구럼비가 살고 있다. 그래서 제주 바다의 바위를 구럼비 바위라 부른다. 강정의 중덕 해안을 이루던 구럼비바위는 길이 1㎞가 넘는 한 덩어리의 바위다.
화산이 폭발해 흘러내린 용암과 바다에서 솟아난 바위가 한 덩어리가 된 바위해안. 그 신기한 바위에서는 용천수가 솟았고, 붉은발말똥게와 맹꽁이 같은 멸종 위기의 생명들이 함께 살았다. 이 바위를 폭파하는데 43t의 화약이 들었다.
아, 참 좋았다, 라고 생각하니 폭삭 늙은 기분이 든다. 강정 포구에서, 강정 앞 바다를 바라보며, 그래, 별 상관없는 시를 읊을까, 그래. ‘알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강정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같이 환한 얼굴 빛내며 꼭 내가 물어보면/ 금방 대답이라도 해줄 듯 자신 있는 표정으로 (장정일의 ‘강정 간다’ 중)’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생명을 품은 바다의 숲](https://www.yeongnam.com/mnt/file/201211/20121116.010380756220001i2.jpg) |
상모리 해안 평화의 징검다리 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평화의 방사탑’. 방사탑은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 |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생명을 품은 바다의 숲](https://www.yeongnam.com/mnt/file/201211/20121116.010380756220001i3.jpg) |
강정포구 방파제에서 강정마을을 본다. |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생명을 품은 바다의 숲](https://www.yeongnam.com/mnt/file/201211/20121116.010380756220001i4.jpg) |
강정마을을 가르고 있는 해군기지 공사장 펜스. |
<>여행 팁
서귀포 대정읍의 상모리와 하모리는 제주도 최남단에 자리한 마을이다. 대장금이나 올인을 촬영했던 송악산이 있고 용머리 해안과 산방산, 알뜨르 비행장 등이 지척에 있다. 하모리의 모슬포항에 가파도와 마라도로 가는 배가 있고, 상모리에는 마라도로 가는 배가 있다. 강정마을은 대정읍 상모리 해안에서 서쪽으로 중문관광단지 지나면 있다. 강정마을 교회가 예쁘고, 바로 옆 중국집 짜장면이 맛있다. 버스정류장 맞은편 해군기지건설 반대 베이스캠프에서 판매하는 귤도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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