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역 최근 트렌드
기존 이분법적 권선징악 탈피…“불가피한 선택” 다층적·입체적 캐릭터 등장
악역 캐릭터를 앞세운 드라마들이 주목받고 있다. 시선을 자극하는 막장 코드와 특정 장르에 국한된 드라마들이 이제껏 안방극장을 주도해 왔다면, 악역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들이 최근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내딸 서영이’ ‘착한 남자’ ‘메이퀸’ ‘다섯손가락’ 등은 탄탄한 이야기와 구성으로 동시간대 경쟁작을 제치고 우위를 점하는 대표작들. 특히 기존의 이분법적 권선징악을 따르지 않는 입체적인 캐릭터의 등장은 드라마가 담고자 한 사랑과 이별, 복수와 갈등을 통한 치유의 과정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게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 단순한 악역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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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다섯손가락’의 채시라 |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닌 ‘이럴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이해되는 선악이 모호한 여자다.” SBS ‘다섯손가락’에 출연 중인 채시라는 자신의 극 중 캐릭터인 영랑을 이렇게 정의했다. 영랑은 남편이 밖에서 낳아 데려온 지호(주지훈)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신의 친아들 인하(지창욱)에게 회사를 물려주고자 지호에게 횡령과 표절 심지어 살인 누명까지 씌우는 등 온갖 계략과 음모를 서슴지 않는다. 영랑은 바람둥이 남편과 끊임없이 자신을 못살게 구는 시어머니 밑에서 꿋꿋하게 살아왔다. 인하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모성의 힘으로 버텨온 것이다. 결국 영랑의 악행에 치를 떨던 시청자들도 그의 굴곡진 인생사를 알게된 뒤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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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손가락’의 지창욱 |
인하 역시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지호에게 온갖 누명을 씌우며 모함을 하고, 형이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랐다. 간혹 그런 자신이 미워 괴로워하고, 삶을 끝내려고 하는 모습에선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지창욱은 애초 완전한 악인으로 설정됐던 인하 캐릭터에 자기 생각을 녹여 좀 더 유하고 상처가 많은 인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지창욱은 “인하와 영랑이 나쁜 인물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피해자다. 인하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감정을 끌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KBS 2TV ‘내딸 서영이’는 무능하고 못난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불행 때문에 부녀의 연을 스스로 끊어버린 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 최고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 딸의 독기도 감싸안은 아버지를 통해 혈연 그 이상의 의미를 되짚는다. 서영은 그 점에서 패륜아로 치부돼도 마땅한 인물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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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TV ‘착한 남자’의 박시연 |
KBS 2TV ‘착한 남자’의 한재희(박시연)도 마찬가지. 한재희는 아빠 서정규(김영철)로 인해 상처를 입은 서은기(문채원)를 걱정하는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냉혹한 본성으로 문채원에게 회심의 한 방을 날리는 반전 매력을 과시했다. 더욱이 자신의 살인죄를 뒤집어쓰며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강마루(송중기)에게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야망을 위해 숨겨진 발톱을 드러낼 땐 악녀의 본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런 그녀 역시 강마루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애처로운 모습에선 연민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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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메이퀸’의 재희 |
MBC ‘메이퀸’ 역시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매력적인 악역 캐릭터 덕분에 사랑받고 있다. 극 중 창의 역을 맡은 재희는 “악마로 변신하겠다”고 선언한 뒤 확 바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재희는 그동안 해주(한지혜)의 따뜻하고 든든한 정혼자이자 후원자의 모습을 보여왔지만, 아버지 기출(김규철)의 악행을 알게 된 뒤 변신했다. 그의 변신은 아버지의 배신에 대한 실망, 도현(이덕화)에 대한 증오 때문이다. 도현의 아들인 일문(윤종화)도 비록 악행을 일삼지만, 측은한 인물이긴 매한가지. 아버지로부터 무시당하고 어린 시절 친구인 강산(김재원)으로부터도 무시를 받아왔던 일문은, 이 때문에 부잣집 아들임에도 항상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 사회상을 반영하는 입체화된 캐릭터
드라마가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는 건 복잡해진 사회상을 반영한다. 김영섭 SBS 드라마국장은 “예전에는 단순히 극적인 효과만 따져서 당위성이 없는 악역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하지만 100% 악한 사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의 개연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입체적인 캐릭터가 차츰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고영탁 KBS 드라마국장 역시 “사회 자체가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이 생각하는 가치관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고 있다”고 짚었다.
한편으론 악이라 할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양면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 이러한 기류는 ‘하얀거탑’(2007)의 장진혁(김명민) 캐릭터를 통해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여기엔 권선징악적인 과거의 구조로는 극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 한 방송 관계자는 “‘하얀거탑’ 이후 나타난 캐릭터 변화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단순한 악역은 현실감이 떨어지게 됐다”며 “현재를 살아가는 삶이 단순히 도덕적인 잣대로만 규정지을 수 없고, 부득이 나쁜 일도 선택하게 되는 등 살기 팍팍해진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선악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에 대한 부작용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석현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간사는 이 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한 대비책으로 드라마의 완성도를 제시했다. 완성도가 높은 드라마는 자극적인 소재를 쓰더라도 시청자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다는 것. 그는 “수시로 모니터링을 하면서 적절하게 내용을 수정해 나간다면 소재에 대한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문했다.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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