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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순 <영문학 박사> |
현 과학계에서 화두로 떠오르고 있으며, 고도로 발달된 창조적 힘을 보여주는 휴머노이드 로봇은 인간의 주거 환경을 정화시켜주며 인간과 공감할 수 있는 로봇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진보와 풍요의 상징이 될 수 있는가?
과학소설의 효시가 되는 19세기 여성작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주인공 빅터는 과학자로서 생명의 원리를 밝히고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시신의 부분 부분 기관을 연결시켜 이름 없는 인간 괴물을 완성한다. 이 소설은 인간창조를 합법화하는 과학계의 메커니즘이 삶의 주요원리가 된 주체 빅터의 과잉 욕망을 담아내고 있다.
과학계의 에토스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려 했던 빅터가 괴물을 창조하고 급기야 가족까지 희생시킨 사건은 개인과 공동체의 결속력을 위협하는 차원으로 드러난다. 빅터가 창조한 끔찍한 괴물은 그의 야망과 그의 캐릭터를 어처구니없고 심지어는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창조자 빅터의 상상력은 이상화된 인물을 만들어내지도 못하였으며, 단지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빅터가 괴물과 만나는 사건은 독자로 하여금 과학적 문명의 진보성과 그것의 한계를 함께 점검하게 한다. 빅터와 같은 과학자의 이러한 모순적 행위는 바로 돌이 굴러 떨어짐에도 계속해서 언덕 위로 돌을 밀어올리는 시시포스의 반복적이며 모순적 행위와 많이 닮아있다. 매튜 아놀드는 ‘문명과 무질서’란 저서에서 이같은 인간의 모순적 삶에 대해 진지한 도덕적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산업혁명 이후 절정기에 달한 빅토리아조 영국사회의 삶이 물질주의와 자유방임주의의 팽배로 인해 진정한 인간다운 삶을 만들지 못했다면서 이같이 문명을 비판한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빅터의 창조작업은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과학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인간 특유의 감성을 연결하는 인간적인 유대를 대신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진보와 풍요의 상징으로 떠오르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세계보다는 타인과의 소통을 인정하며 약간은 불편한 세계가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편을 즐기는 것 또한 또 다른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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