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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성문 |
“잘 자. 내 꿈 꿔.”
한때 유행했던 이동통신사 광고 카피다. 요즘 작은딸이 매일 밤 나에게 하는 밤 인사이기도 하다. 작은딸은 다음 날 아침이면 자기 꿈을 꾸었는지 확인하고 내 꿈에 자기가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면 “딸에 대한 애정이 없군”이라며 섭섭해한다. 도대체 사춘기 딸을 둔 아버지는 꿈도 내 마음대로 꾸지 못한단 말인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제부터인가 꿈을 꾸는 날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꿈을 꾸기는 한 것 같은데 무슨 꿈이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아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되풀이하는 일상이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것 같다. 나이 들어가는 것인가? 꿈 많았던 젊은 날들로부터 내 삶이 멀어져가는 것인가?
좋은 꿈은 생활에 활력이 된다.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나 하루 종일 혹은 며칠 동안 나의 삶이 활기 넘쳤던 날의 기억이 아득하다. 젊은 날 꿈꾸었던 혁명과 같은 새벽은 간밤의 숙취조차 이기지 못하고 구토를 하며 스러진다.
물론 아무리 좋은 꿈을 꾼다고 한들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않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허황된 꿈이라면. 꿈은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희망고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차라리 꿈꾸지 말 것을….’ 이룰 수 없는 꿈 때문에 삶이 더욱 힘들고 고단할 수도 있다.
어느 TV코미디 코너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유행어가 생각난다. 소수의 가진 자들의 독점이 대물림되는 반면 이따금씩 용이 났던 개천은 콘크리트 복개도로 아래 시궁창으로 바뀌고 말라버린 시대.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현실이 시스템화한 요즘 세상에서 꿈은 희망보다 좌절에 가까운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딸에게 꿈을 가지라고 이야기하고 딸은 나에게 행복한 꿈을 꾸라며 희망고문을 한다. 꿈이 개인의 희망고문이라면 꿈조차 없는 삶은 사회공동체의 비극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잔혹한 고문은 꿈 없이 세상에 고분고분하게 순종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하는 딸들아. 오늘 밤은 꼭 너희가 내 꿈속에서 웃고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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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내 꿈 꿔”](https://www.yeongnam.com/mnt/file/201312/20131211.01022075704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