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들마을 배고픔’ 함께했던 장계향의 의리·나눔 철학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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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 부부의 나눔과 배려의 철학이 담겨있는 영양 석계종가의 도토리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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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이 지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술 중 하나인 감향주. 떠먹는 술로, 석계종가 조귀분 종부가 재현해 맛을 본 많은 이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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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 부부가 심어 그 열매로 도토리죽을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었던 영양 두들마을 도토리나무들. |
◇석계 이시명의 아내 장계향
만석꾼 재산 마다하고 남편따라 마을 정착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 저술해
◇노블레스 오블리주 음식 도토리죽
굶주림 겪는 주민들 위해 도토리나무 심어
열매로 죽 쒀 나눠먹어…최근 웰빙식 재현
◇알코올 12도 ‘떠먹는 술’ 감향주
조귀분 종부가 음식디미방 비법으로 빚어
향기롭고 특별한 맛에 각국 정상들도 탄성
‘성인으로 존경받는 사람이라 하여 우리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보통 사람과 아주 다르며 유별나게 뛰어난 일을 한다면, 우리가 참으로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의 생김새와 말은 처음부터 보통 사람과 똑같으며 성인의 행동 또한 모두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늘 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성인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을 근심할 일이지 진실로 성인을 배운다면 무엇이 어려운 일이겠는가.’
‘나는 세상 사람들이 물욕으로써 의리를 해치는 일을 매우 근심하고 있다. 의리는 소중한 것이고 물욕은 가벼운 것인데 어찌 소중한 의리를 버리면서 가벼운 물욕을 취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이 비록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지만, 나는 그 일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너희들이 선행을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기뻐하면서 잊지 않을 것이다.’
석계(石溪) 이시명(1590~1674)의 부인으로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불리던 장계향(1598~1680)이 자식들에게 늘 강조했던 말이다. 장계향의 아들 갈암(葛庵) 이현일(1627~1704)이 모친인 장계향의 언행과 생애를 기록해 남긴 ‘정부인안동장씨실기(貞夫人安東張氏實記)’에 나오는 구절이다.
장계향은 안동에서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도학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며 산 선비 경당(敬堂) 장흥효(1564~1633)의 외동딸이다. 이런 선비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장계향은 어릴 적부터 유교 경전을 익히며 그 가르침을 일상생활을 통해 깨달으려 했다. 또한 10세 전후에 벌써 붓글씨와 시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랬으나 10대 중반에 “시를 짓고 글씨 쓰는 것은 여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라고 여기고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19세 때 이시명의 둘째 부인으로 시집가서 전처 소생 1남1녀에다 본인이 낳은 6남2녀를 훌륭하게 키우고 가르치면서, 시가와 친가의 부모를 정성을 다해 돌보며 살았다. 또한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최초의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저술해 남긴 주인공이기도 하다.
의리를 강조하고 배려와 나눔의 삶을 실천한 그의 철학은 음식에도 잘 나타난다. 그 대표적 음식이 영양 석계종가의 도토리죽이다.
장계향의 음식에 대해서는 이현일이 “어머니는 음식은 단출하여 복잡하지 않은 것을 중히 여기고, 음식 맛이나 빛깔은 산뜻했다"고 적고 있다.
◆가난한 이웃과 나눠 먹던 ‘도토리죽’
장계향은 이시명에게 시집 가(1616년) 영덕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임진왜란(1592년)에 이은 정묘호란(1627년)으로 주위에서 몰려드는 피란민과 걸인들을 시아버지와 함께 돌보는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자신은 만석꾼의 집안에 살았지만 군자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을 삶의 철학으로 삼았기에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웃들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를 항상 생각했던 것이다.
1631년에는 영양 석보(두들마을, 언덕 위 마을)에 집을 짓고 분가를 했다. 이때 장계향은 남편과 의논을 한 뒤 빈민 구휼을 위한 수단으로 석보의 집 주변 언덕 300여m에다 도토리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시아버지 운악(雲嶽) 이함이 위독하게 되어 다시 영덕의 시댁(충효당)으로 돌아가 시부모를 봉양했다. 이듬해 이함이 별세하고 남편과 함께 3년상을 치른다.
장계향은 병자호란(1636년)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기고 은거하려는 남편을 따라 1640년 다시 영양으로 이사 와 살게 된다. 당시 장계향은 만석꾼 집안의 셋째며느리였으나 일절 재산 상속을 받지 않고 이사해 매우 가난한 생활을 시작했다. 자신이 일군 재산이 아닌 것을 받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두들마을에 정착한 후 대부분의 주민이 굶주리며 고통을 받는 생활을 이어가는 가운데, 다행히 1931년에 심은 도토리나무가 잘 자라서 열매를 맺기 시작해 그 열매를 따서 도토리죽 등 음식을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으며 가난을 극복해 갈 수 있었다. 당시에 심어 가난을 극복하게 해준 도토리나무들은 지금도 석계종택이 있는 두들마을 앞 언덕에 잘 자라고 있다.
장계향의 도토리죽을 지금은 석계종가 조귀분 종부가 다시 재현해 그 뜻을 헤아리며 웰빙음식으로 내놓고 있다. 도토리묵이나 도토리떡으로도 만들어 먹고 있다.
이돈 종손은 “도토리죽을 비롯해 할머니가 남긴 음식디미방 음식은 그 음식 자체보다도 거기에 담긴 정신, 즉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하고 사익보다는 정의를 먼저 생각하며 나눔과 배려를 실천한 정신이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 실천할 소중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들마을 앞 천변의 바위에 새겨진 ‘낙기대(樂飢臺)’ ‘세심대(洗心臺)’는 장계향 부부의 이런 철학을 대변하고 있다.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떠먹는 술 ‘감향주’
‘이 책은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절대로 내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빨리 떨어져 버리게 하지 말아라.’
음식디미방 말미에 후기로 장계향이 적어놓은 글이다. 이 당부 덕분에 후손들이 잘 간수해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최근에는 석계종가 조귀분 종부의 솜씨와 노력 덕분에 음식디미방 요리가 특히 각광을 받고 있다. 음식디미방은 음식문화를 전공하는 학자들 대부분이 주저 없이 우리나라 최고의 식경(食經)으로 꼽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1670년경에 정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음식디미방에는 총 146가지의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다. 이 중 주류에 관한 것이 51가지나 된다.
조귀분 종부는 음식디미방보존회 회장을 맡아 음식디미방 음식을 재현하며 그 우수성과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음식디미방의 술도 재현하고 있는데, 그중 특히 감향주가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다.
‘멥쌀 한 되를 깨끗이 씻어 가루를 내어라. 그 가루로 구멍떡을 만들어 익도록 삶은 후 식혀라. 구멍떡을 삶던 물 한 사발에 누룩가루 한 되를 구멍떡에 함께 섞어 쳐서 단지에 넣어라. 찹쌀 한 말을 깨끗이 씻어 밑술을 하는 날 물에 담갔다가 사흘 후에 익도록 쪄라. 식지 않았을 때 밑술을 퍼내어 섞어 항아리에 넣는다. 더운 방에서 항아리를 여러 겹 싸 두었다가 익거든 써라. 쓴맛이 나게 하려면 항아리를 싸지 말고 서늘한 곳에 두어라. 많이 빚으려면 이 법을 미루어 적용해 빚어라.’
음식디미방의 감향주 빚는 조리법 설명이다.
감향주는 매우 특별한 술이다.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하는 술인데, 맛이 향기로우면서 매우 좋다. 알코올 도수는 12도 정도 될 것이라고 한다.
석계종가의 이 감향주는 지난 4월12일 제7회 세계물포럼 개회식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각국 정상 및 주요인사 환영오찬에서 음식디미방 요리와 함께 등장했다. 이 자리에서 공식 건배주가 된 이 감향주는 그 각별한 맛으로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이에 앞서 지난 3월25일 서울 ‘한국의집’에서 열린 ‘음식디미방 시식연’에서도 주한 외교관들의 호평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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