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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향금 <대구현대미술가협회 회장> |
중세 말 마사초란 화가는 ‘성삼위일체’를 그리면서 예수의 모습을 신격으로 전형화시키지 않았고 인간의 그것과 같이 피가 흐르고 근육이 살아있는 듯이 표현하였다. 나는 마사초의 ‘성삼위일체’를 바라보면서 중세로 돌아가 중세인의 모습이 되어 그 그림을 처음 대했을 때의 흥분과 경이와 두려움을 느껴보았다. 아마도 그 그림을 감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중세인은 중죄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혁명의 씨앗은 두려움을 벗어 던질 수 있는 자의 이상으로 시작됨이 분명하다. 마사초 이후 르네상스는 진정 신과 가까이 가기 위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스스로를 믿고 신이 주신 삶에 깊이 동요하여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이후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신의 영역을 살과 피가 흐르는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함을 서슴지 않았다.
예술은 언제나 혁명을 꿈꾼다. 예술의 발전은 그 누군가에 의해서 시대를 앞서가는 전위와 진보의 행보에 있었다. 예술가 한 사람, 한 사람의 탐구와 노력들은 전위이며 진보를 향한 예술의 행진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예술가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손에는 ‘문화융성’이라는 깃발을 들고 행진가를 불러대는 이들이 예술가들을 어디로 내몰고 있는가를 깊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국민 누구나가 예술을 즐기고 향유하는 사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인가. 문화가 융성한다는 것은 삶의 질과 가치의 변화가 덧붙여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문화융성은 결코 문화산업이라는 맥락으로만 흘러서는 안 될 일이다. 또한 생활예술 등의 문화향유의 확대는 거시적으로 보면 복지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가처럼 미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예술의 길을 갈 수도 없고, 제대로 된 삶도 꿈꿀 수 없는 순수 예술가에게 사회와 정부가 가지는 채무에 대하여 깊이 묻지 않더라도 문화융성이라는 깃발이 여기까지 어려운 행보를 이어 온 예술가에게 깃발 아래 드리워진 그늘 속으로 억지로 들어가라 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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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예술은 혁명을 꿈꾼다](https://www.yeongnam.com/mnt/file/201509/20150901.01025083948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