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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선홍빛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진달래가 필 것 같은 봄날이다. 이렇게 상쾌할 것 같은 도시의 아침은 사막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온 미세먼지로 온통 회색빛이다. 봄이 왔지만, 지난겨울 사용하던 마스크를 착용하고 출근하는 시민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또 다른 겨울이다.
며칠 전 80대의 할머니 한 분이 오셨다. 죽고 싶다고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20세까지 살게 해달라고, 비싸도 좋은 것은 다 달라고 하던 멋쟁이 할머니다. 모교의 대학병원 내과 근무시절부터 줄곧 주치의인 나에게 진료받으러 오시던 할머니. 그 연세에 대학을 나오고, 재력도 대단했다. 그런데 살고 싶지 않다니. 그것도 되도록 빨리. 어인 일일까.
나는 순간 통장 잔고가 바닥나기 전에 빨리 죽고 싶다는 일본 노인들의 아우성이 현실로 다가옴을 피부로 느꼈다. 한 달 전 할아버지가 담관암으로 돌아가시고, 많은 재산은 치료비로 모두 탕진했다. 이젠 할머니 혼자서 오랜 지병까지 감당하려니,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잘 키운 자식들은 고향을 떠나 서울과 외국에 살고 있어 몸이 아파도 함께 아파해줄 사람도 없고, 배가 고파도 손수 밥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평생 잘 살 것 같던 재산도 어느덧 바닥이 나고 마음과 육신이 너무 아파서 힘들어도 함께 울어줄 이도 없다는 것이다.
고독사했다는 어느 노인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연금과 나름대로 노후 준비를 해왔다는 노인들에게조차 장수가 악몽이 되고 있는 것은 일본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46%로 OECD국가 중 최고다. 특히 우리나라는 노후자금을 자식교육비나 결혼자금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우리는 TV나 신문 지면으로 하루하루를 절망으로 살아가느니, 독거사로 영원히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이들도 있음을 종종 접한다. 속수무책 슬픈 그들의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닌 내 얘기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정치막장 드라마가 한창이다. 권력의 암투, 배신, 위선으로 인해 밤잠을 설치며, 분명 이 아름다운 봄밤에도 춘몽을 꾸지도 못한 채 잠 못 이루는 분들이 많으리라.
어려운 경제로 파산을 선고받은 이들의 주머니에도 봄은 정녕코 오지 못하고 있다. 테레사 수녀가 성인 반열에 오르는 것은 차갑고 매서운 꽃샘추위를 훈훈하게 해주는 최대의 하이라이트다.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과 온정의 손길로 우리 마음의 온도를 높일 수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따뜻한 봄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박언휘 <박언휘종합내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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