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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희 <화가> |
화가에게 기법은 ‘비밀 병기’와 같다. 기법은 형상에 피를 돌게 한다. 화가는 자기만의 기법을 창안하기 위해 평생을 건다. 기법은 감출수록 빛난다. 그것이 기량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기법은 무궁무진해진다. 그 중에 ‘여백’이 있다. 화가라면 한번쯤 여백의 미에 필이 꽂혔을 것이다.
‘중국미술사’의 저자 마이클 설리번은 “중국의 화가들이 화면 속에 남겨놓은 공백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 속에서 그 여백을 완결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백은 화가의 정신적 깊이와 함축된 도(道)의 표현 수단으로, 그 어떤 회화적 기법보다 웅변적이라고 보았다.
여백이 화가의 특급 기교로 자리매김한 것은 남송(南宋)시대였다. 강남의 습윤하고 나지막한 산수를 그리는데 여백의 효과가 절묘했기 때문이다. 여백에는 풍부한 시정(詩情)과 계절의 변화까지 담을 수 있다. 때로는 바람이 불고 자욱한 안개가 날아와 비가 내리는 공간이다. 여백은 ‘미완’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완결’의 의미다. 여백은 수시로 감상자가 드나들 수 있게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남송시대의 마원은 여백을 그림의 화법으로 확립한 대표적인 화가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화면의 엄숙함이 아니라 시적 정취였다. 화면의 절반 내지 3분의 1을 여백으로 처리하거나 전체 화면의 5분의 4를 여백으로 처리하는 일각구도(一角構圖)를 사용했다. 표현한 형상보다 비워둔 여백에 더 큰 의미를 둔 것이다.
그의 ‘산경춘행도(山經春行圖)’는 시와 글씨와 그림을 적절한 여백으로 조형한 시의(詩意)가 넘치는 작품이다. 화면의 구성은 대각선 구도이며, 대부분의 경물이 화면의 왼쪽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야트막한 언덕에는 두 그루의 나무를 배치했다. 봄기운 물씬 풍기는 오후, 시인은 강가를 거닐며 시상에 젖는다. 동자는 거문고를 든 채 주인을 뒤따른다. 시인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멀리 허공을 가르는 새와 나뭇가지에 앉은 새소리에 마음을 연다.
화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는 형상이고, 텅 빈 오른쪽 공간에는 제시(題詩)로 운치를 더했다. 수묵담채의 가벼운 멋을 살려 맑고 청아하다. 형상을 둘러싸고 있는 여백으로 그림의 완성도를 높였다. 여백이 진국이다. 영화로 치면, ‘주연급 조연’이다.
화가의 묘수는 노련한 기교와는 격이 다르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기법은 인고의 세월에 담금질된 것이다. 사람도 그림과 같아서 기교가 화려한 것보다는 여백이 있는 사람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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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화가의 ‘비밀 병기’](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8/20160801.01022080017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