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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 <수성아트피아 공연기획팀장> |
어릴 적 집 서재 한편에는 세계명작가곡집이라는 책이 있었다. 부모님이 그리 예술적 조예가 깊은 분들은 아니었지만, 이따금씩 집에선 가곡 노랫소리가 들리곤 했다. 아버지는 ‘비목’, 어머니는 ‘선구자’를 자주 부르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한 번씩 아버지께서는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를 흥얼거리듯 부르시기도 했다. 그렇게 한 번씩 귀동냥으로 듣고, 가곡집 책장을 넘기며 가사도 따라 읊어본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 반 아이들 앞에 나가 노래 솜씨를 뽐낼 기회도 생기곤 했다.
폼 나는 전축에 LP를 올려놓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 풍경은 아무 집에서나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시절엔 어느 집 책장에서나 가곡집 한 권 정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 가서는 ‘보리수’가 ‘겨울 나그네’ 중 한 곡이라는 것도 배웠고, 몸도 마음도 중후하신 음악 선생님이 그윽한 목소리로 슈베르트의 가곡들을 들려주셨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이 일을 하게 되면서 ‘피셔 디스카우’란 가곡의 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가곡 좀 부른다 하는 성악가들에게 ‘제2의 피셔 디스카우’란 별칭이 마치 훈장처럼 따라다니는 것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몇 해 전 바로 오늘의 주인공 이안 보스트리지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해외 매니지먼트사와의 첫 직거래를 위해 공연계 선배에게 몰래 얻은 영문계약서 샘플에 담긴 이름 ‘Ian Bostridge’. 그렇게 그 이름은 내 머리 한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었고, 이제 2주 후면 드디어 수성아트피아에서 그와 만난다.
한 편의 공연을 기획하는 데 꼭 무슨 거창한 이유가 필요할 것 같지만 실은 이런 조그만 기억과 인연들이 이어져 꿈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안 보스트리지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디스카우의 제자 마티아스 괴르네와 어떻게 다르게 ‘겨울 나그네’를 부르는지 듣고 싶어 공연장에 오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올 11월은 그와 함께 기억 속 어딘가에 있을 가곡과의 인연을 찾아 떠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멋진 영국 신사의 자태로 우리 앞에 나타나 한곡 한곡을 부르며 가난과 고독 속에서 요절한 슈베르트의 분신으로 변해가는 절절한 그의 모습을 보며 멋있었던 선생님이 생각나고, 가곡을 즐기시던 부모님이 생각나서 극장 문을 나서며 ‘보리수’ 한 소절을 흥얼거리는 관객이 있다면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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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가곡 ‘보리수’](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10/20161027.01023081216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