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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옥 <문화평론가> |
3월이면 각 학교는 새내기들을 맞는다. 출발점에 선 입학생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초롱초롱한 별빛이다. 과장 조금 보태면 태산도 움직일 태세다. 몇 주 후면 곧 풀어질 긴장이지만 시작은 늘 긴장만큼 야무지고 단단하다. 고루하더라도 초심을 추세우며 “준비하는 자는 넉넉한 미래가 기다린다”는 말에 힘주고 수업을 시작한 지 20년.
어느새 12월이고 다시 학기 말이다. 이맘때면 학생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호환마마보다는 덜하겠지만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기말평가다. 수업시간마다 밑줄 친 핵심을 재점검해야 하는 긴장감은 “주관식? 아니면 객관식? 총 몇 문제예요?”와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긴장과 열성은 기성세대들의 어제였을 것이다. 반드시 시험이 평가의 척도는 아니지만 객관적인 잣대에 임해야 하는 그들의 오늘이 오롯이 전이된다.
학기말이면 학생들을 마주하는 마음이 적잖이 무겁다. 병존하는 희망과 불안을 모른 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냉혹한 현실에 뛰어들 그들에게 비현실적인 이상만 심어준 건 아닌지 돌아보게도 된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숙명이지만 곧 밀어닥칠 현실에 대한 불안감은 현재 대한민국 청년실업자들의 고난이다. 더욱이 예술은 냉엄한 현실과 맞대응할 직접적인 무기가 못 된다는 인식이 강해 미술학도들의 시름은 깊다. 애초 이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증을 겨냥한 학업은 아니지만 호구지책을 간과할 수 없는 현실 아니던가. 더해 인문학과 예술 관련 학과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현실이 아무리 냉혹해도 학문의 전당이 사라지는 것은 가혹하다. 예술과 인문학의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가늠되고, 온전한 인격체는 영육의 건강이 두루 겸비될 때 이뤄진다. 학교가 구심점이 돼준다면 좋겠다.
이 모든 것이 비단 학생들만의 고민일까. 필자의 경우는 주어져야만 강의를 할 수 있는 시간강사다. 학교에선 20년째 정교수가 아닌 미(未)교수인 셈이다. 어느 날 학생들의 미래를 걱정하던 필자에게 날아온 비수를 잊지 못한다. 정교수도 아닌데 사서 남의 앞날에 참견한다며 학사에 몰입할 수 없는 강사라는 직분을 또렷이 각인시킨다. 솔직함이 장점인 친구는 주어진 강의만 적당히 하고 여유를 찾으라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한 충고였고, 비수로 받아들인 자만 어리석다.
그렇다고 현실에 굴복하며 푸념만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현재라는 시간만 보는 자는 불확실한 미래만 있을 뿐, 교수든 강사든 학생들의 미래가 순탄하고 활기차길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다. 오늘도 이 불치병을 안고 강의실을 나온다. 이러는 나, 오지랖인가? 극성인가? 해묵은 직업병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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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직업병](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12/20161219.01023080018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