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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은 질문들이 나를 괴롭게 한다.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아닌가/ ㅡ항상 해야 한다/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ㅡ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불친절해지고 싶다.’(이현승 ‘벌레의 기분’) 이제는 예술가가 특별한 가치나 지위를 갖는 때도 아니고,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도 흐릿해지는 때인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자기만의 표현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영역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야말로 녹록지 않다. 하고 싶은 창작활동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은 물론, 돈이 되는 일과 되지 않는 일에 끊임없이 비교당한다.
절친한 후배 A는 몇 년째 영상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제는 마무리를 해서 후반작업에 들어가야 할 때인데 못 하고 있다. 물론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이 단기간에 끝나는 성격이 아닌 탓도 있지만, 생활 때문에 정작 창작활동에 보다 집중하지 못하는 탓이다. ‘예술강사’라는 이름으로 학교나 사회단체 같은 곳에서 수업을 하는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지원되지 않는다고 한다. 탄핵된 정권에서 문화예술 관련 사업의 예산이 크게 줄어든 탓도 있다.
자본의 이익이나 상업의 목적에서 자유로운 예술창작이 보장되는 시대가 올 수 있을까. 대답은 절망 쪽으로 훨씬 기운다. 사실 자세히 보면 공급은 넘쳐난다. 그것은 상품유행의 흐름을 따라가는 궤적이다. 그 속에서 소수의 인정받은 재능과 다수의 창작열의만 가진 재능은 구분된다. 그러니 창작열의만 갖고 창작활동을 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안정과 성공이라는 유혹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만 해도 일찌감치 나가 떨어질 만 하다.
순수한 창작열의를 창작활동으로 거듭 단련하게끔 보장하는 사회는 없었다. 오히려 가난과 소외에서 더 빛나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역설이 정설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문화예술가들을 정치의 논리로 재단해서 감시와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 실정이었다. 이번 대통령선거운동 기간에도 내 편이 아니면 척결하겠다는 무지막지한 말이 십자포화로 퍼부어졌다. 문화나 예술에 대한 이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차지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19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가난한 예술지망생들이, 창작자들이 창작과 생활 사이에서 최소한 ‘벌레’의 기분이 들지 않는 환경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런 환경을 만들어갈 권리는 바로 나에게 있음에도 말이다. 김한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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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창작자의 생활](https://www.yeongnam.com/mnt/file/201705/20170509.01025080029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