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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2학년인 아들이 언제부터인가 자기 방에 드나드는 것도 불편해 한다. 그런데 아들이 엄청난 고열에 아프다. 평소에도 몸이 약해서 유행하는 감기는 자신의 특허처럼 앓는다. 내게 와서는 안아 달라고 하더니 엄마 팔에다 손에다 입맞춤을 하고는 사랑한다는 멘트를 거침없이 날린다.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아직은 아이와 청년의 경계에 서있는 사춘기 아들을 통해 한 남성으로서의 성장을 지켜본다. 머리가 커지면서 사랑한다는 말수도 줄고 표현도 줄었지만, 아프고 기대고 싶으니 이내 원래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표현에 서툰 것이 아니라 표현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미가 풍겨야만 밀림의 정글 같은 사회에서 좀 더 자유로운 쟁취가 가능하다고나 할까. 아이들이 욕을 하지 않으면 대화도 할 수 없고 무리에 끼일 수도 없는 분위기가 아마도 같은 이치이겠지 싶다.
대학 때 친한 친구가 총여학생회장을 했다. 그 시절의 총여학생회는 페미니즘의 이념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큰 가치였다. 나는 그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오래전부터 불편했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부터 성 평등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영재였던 똑똑한 분이셨고, 평생을 책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던 분이셨다. 그에 비하면 엄마는 무지렁이였지만 나름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 그래서 엄마는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종가 며느리로 시집 와서 큰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경제활동을 하시던 분이다. 나는 어머니를 통해 여자가 가진 역량을 일찍부터 보아왔다. 그래서 양성평등을 외쳤다. 어쩌면 페미니즘은 피해의식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물론 남성중심의 사회가 그 피해의식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피해의식을 안고 가는 것만큼 소모적인 일은 없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의 내면을 당당하게 내보일 수 있는 세상. 강함을 감추어야만 제대로 된 남성으로 인식되는 사회는 이미 갔다.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이 바뀌고 있는 시대를 살면서 ‘거친 남성미가 웬말이니’라고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그것마저도 성장의 과정이라 여기기에 그냥 지켜보련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해주고 싶다. 현대사회의 경쟁력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다름 속의 ‘배려’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김향금 <대구현대미술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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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이 시대의 경쟁력](https://www.yeongnam.com/mnt/file/201706/20170608.01023075300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