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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클래식음악감상실 ‘르네상스’ 이야기(하)] 시인 구상·영화인 신상옥 등 수많은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의 성지

2019-02-08
[대구 클래식음악감상실 ‘르네상스’ 이야기(하)] 시인 구상·영화인 신상옥 등 수많은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의 성지
대구 향촌동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있던 건물의 현재 입구 모습. 그 앞에서 관광객들이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대구 클래식음악감상실 ‘르네상스’ 이야기(하)] 시인 구상·영화인 신상옥 등 수많은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의 성지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있던 건물(오른쪽) 주변 모습.

◆미국 음악잡지 에튜드 기사

<전쟁 전 박(박용찬)은 서울에서 살았다. 그는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음악은 그의 첫사랑이었고, 음반 수집에 쏟아부은 그의 20년 세월은 단순한 취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순수 음악을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당시 한국은 3개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자랑했고, 실질적으로 모든 교양있는 한국인은 모국 출신과 외국인 주요 작곡가들의 작품과 친숙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가 침략해 오고 음악가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중한 음악 도서가 파괴되고, 오케스트라 총보들이 불타거나 소실되었으며, 수집된 음반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에 포효하고 있던 그 홀로코스트의 한가운데에서 박은 그의 애장 음반 4천개를 구해내는 거의 기적적인 구원의 위업을 해내고, 남쪽 대구로 그것들을 안전하게 가져왔다.

박용찬, 음반만 한 트럭 싣고 피란
전쟁에 지친 예술가들의 활력처
향촌동 건물 아직도 남아 있어
건물 벽면에 안내 표지판 부착

1953년 휴전 후 문 닫고 서울로
문인 김동리·화가 김환기 등 단골
한때 전성기 누리다 1987년 폐업
음반·오디오 등 1만3천여종 기증


침략자들이 물러간 지금, 한국은 희망 가득히 재건되고 있다. 그러나 음악가·작곡가·지휘자는 아직도 방황하고 있으며, 그들의 희망과 경력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중 많은 이들이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 음악과 악기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소실되었다. 박과 같은 소수의 음반 수집가를 제외하고 한국의 음악적 상속유산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에 휘말린 곤경의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노래의 나라로 남았다. 그리고 이 음악에 굶주린 대중에게 자신의 음반을 활용하는 것이 박의 바람이었다. 그는 르네상스다방을 열어 그것을 성취했다. 이제는 음악 애호가, 학생, 작곡가 및 음악가들이 이 소박한 교향악과의 만남(랑데뷰)을 위해 밤이면 모인다.

그때가 우리의 르네상스 첫 방문이었고, 우리는 쇼팽·폰 베버·오펜바흐에 이르는 선율적 계승을 오가는 박의 컬렉션 범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신청곡을 부탁하기로 결심했으며, 단지 실험을 위해 한국에서 발견하기 가장 가망이 없어 보이는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으로 정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청곡을 건네주고 돌아와 결과를 기다렸다.

방의 저편 벽에는 선반이 달려있고 이 선반에는 음반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수북이 쌓여 있다. 각 앨범에는 한국어 기호가 표시된 식별 태그가 붙어 있다. 이 간단한 목록 체계를 통해 박은 몇 초 만에 앨범이나 개별 음반을 찾을 수 있다.

그는 흔들리는 턴테이블에 음반을 부

드럽게 내려놓고 오래된 진동판(다이어프램) 픽업이 돌아가게 음관을 닳아빠진 홈으로 부드럽게 내린다. 그는 연주되는 곡과 작곡가 이름을 영어와 한국어로 머리 위에 걸려있는 작은 판에 기록한다. 그는 각 작품의 마지막인 한쪽 면이 끝날 때면 레코드를 바꾸기 위해 몇 분 간격으로 의자에서 튀어 나와 신중하고 사랑스럽게 각각의 음반을 털어서 본래의 앨범에 다시 정리한다.

박이 이익을 위해 다방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저녁 내내 차를 마시며 앉아 있는데 1달러도 되지 않는 정도의 한국 돈을 소비했다. 박은 개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의 한 가지 바람은 자기 나라에 훌륭한 음악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의 희망은 자신의 컬렉션(음반수집)을 위해 때때로 새로운 음반을 살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는 새로운 축음기를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버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열렬한 음악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음악 도서관을 만들 수 있는 때를 꿈꾼다.

다가올 미래에 한국의 문화유산은 박용찬과 같은 인내심이 강한 몇몇 사람의 손에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음반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낡고 마지막 축음기가 조용해질 어느 날, 한국 음악에서 클래식 음악을 지키려던 그의 용감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적어도 그 방은 청중에게서 나온 길고 황홀한 ‘아~아~!’라는 탄성과 대비되는 장엄하고 천둥같은 주제 부분이 갑자기 울려 퍼졌다. 재생된 음악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고 음반은 끊임없이 틱틱거렸지만 모두가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의 시작 부분을 알아듣는 것으로 보였다.>

필자들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신청한 무소륵스키의 곡을 찾아 들려준 사실과 함께 청중이 그 음악을 알아듣자 놀라움을 드러내면서 글을 마치고 있다. 무소륵스키(1839~1881)는 러시아 작곡가로 ‘러시아 국민악파 5인’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소개한 기사 전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외신이 타전했다는 것으로 회자되어온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 등의 문구는 찾을 수 없다. 기사 내용을 축약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인용 문구 자체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대구 클래식음악감상실 ‘르네상스’ 이야기(하)] 시인 구상·영화인 신상옥 등 수많은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의 성지
음악감상실 ‘르네상스’ 건물에 부착된 안내표지판.

◆음악감상실 ‘르네상스’

대구 향촌동의 ‘르네상스’는 한국전쟁 당시 1·4 후퇴 때 박용찬이 대구로 피란 오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음반과 관련 기기 등을 가져와 1951년 문을 연 클래식 음악감상실이다. 르네상스는 전쟁에 지친 예술가들이 위안을 받고 감성을 되찾아 활력을 얻는 공간이 되었다. 시인 구상을 비롯한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 그리고 피란왔던 영화인 신상옥·최은희도 자주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사 표현처럼 ‘남한 음악애호가들을 위한 성지’가 되었던 르네상스는 1953년 휴전으로 전쟁이 끝나고 얼마 후 박용찬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되면서 문을 닫게 되었던 것같다.

‘르네상스’는 1954년 서울로 옮겨 종로구 인사동에서 6년간 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후 1960년 12월 서울 종로1가 영안빌딩 4층에 자리잡은 이후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곳은 곧 음악학도와 문화예술인,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의 음악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며 명소가 되었다. 문인 김동리·전봉건·신동엽, 음악가 나운영·김만복, 화가 김환기·변종하 등이 유명 단골 손님이었다고 한다. 시인 천상병은 음악에 빠진 표정이 벽면에 걸린 베토벤 석고 두상을 닮았다고 해서 ‘쁘띠 베토벤’이란 별명을 얻었고, 정경화·명훈 남매는 일요일마다 이곳에서 하루종일 음악을 감상하며 연주기법을 익혔다는 등 많은 일화를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르네상스는 1987년에 문을 닫게 되고, 박용찬은 1만3천여 종에 달하는 음반과 오디오 기기 등을 문예진흥원에 기증했다.

박용찬은 호남 갑부의 아들로, 일제시대 일본의 메이지대 유학시절부터 음반을 수집했다고 한다. 피란길에서 세간살이는 다 버리고 오로지 음반 한 트럭만 애지중지하며 싣고 대구로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음악 애호가였다. 그가 얼마나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는지는 에튜드 기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1994년 8월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향촌동 ‘르네상스’가 있던 건물(단층)은 현재도 남아 있다. 대구문학관 뒤편 골목안에 있는데, 지금은 ‘판코리아 식당’ 간판이 달려 있다. 건물 벽면에 ‘르네상스’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는 안내표지가 부착되어 있다. 대구시 중구청이 만든 것인데 “한국전쟁 당시 박용찬이 개업한 음악감상실.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외신에 소개되었다”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에튜드’에 실린 사진이 보여주는 아치형 출입구는 지금은 없다. 어느 때인가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옆 건물에는 노인들이 이용하는 ‘성인텍 판코리아’가 성업 중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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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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