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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상<시인> |
지난 몇 달은 복잡하고 시끄러웠습니다. 일곱 번이나 태풍이 다녀갔고 애써 가꾼 작물들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법무부 장관이 사퇴했지만 아직 민심은 둘로 나뉘어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밝혀지니 억울한 옥살이의 사연도 드러났습니다.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자연이 남기고 간 상처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소식들이 엉켜서 세상은 더욱 산란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식을 뒤로하고 동네 산을 오릅니다. 활엽의 나무들 아래에선 벌써 낙엽의 냄새가 납니다. 키 작은 쑥부쟁이와 구절초는 향을 더욱 멀리 보내려고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습기 없는 가을볕은 짱짱하게 여물어갑니다. 마음 착한 사람들이 몇 번이나 헹궈내고 말려낸 햇볕 같습니다. 새들은 돌보지 않아도 밝게 지저귀고 솔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만져질 듯 세밀합니다.
마을에서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숲길을 걸었을 뿐인데 고요합니다. 내 몸에서 나는 소리를 내가 들을 정도입니다. 세상의 소리들이 이곳에선 들리지 않습니다. 잠시 후면 익숙한 골목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이 시간은 온전히 나에게 주파수를 맞추는 시간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투명한 이 햇살 아래 한바탕으로 합일하는 시간입니다. 가을엔 기도하겠습니다. 세상의 일과 싸우다가 지친 사람들이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거리에서 헤매는 모든 사람들이 따뜻한 밥이 있는 식탁으로 돌아가기를.
멀리 산 아래 보이는 감나무는 주황색 꽃나무 같습니다. 감을 꽃처럼 매달았습니다. 조금 멀리서 봐야 아름답습니다. 사랑의 일도 그렇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확보해야만 사랑은 숨을 쉬고 팔을 뻗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너무 가까이에서 남을 괴롭힌 일은 없는지 되돌아봅니다. 네덜란드의 작가이자 신부인 헨리 나우웬은 “당신이 어디에 있든 내가 어디에 있든 우리 사이에 놓인 땅은 거룩한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바짝 붙어있다면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용서와 연민과 배려 같은 가치들이 사랑의 땅을 넓혀나갑니다. 거룩한 땅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남을 거룩하게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곳이 거룩한 땅이지요.
인간들이 서로 제 말이 맞다며 미워하며 싸울 때도 포도들은 익어갑니다. 바람과 물과 햇볕을 자기의 시간 안으로 끌어 모아 다디단 과육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곡식이 익듯이 머리를 숙이며 자신을 돌아보게 하소서. 공중을 떠도는 상처의 말들을 잠재워 주소서. 무성한 잎들을 매달고 있느라 애쓴 나무의 몸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라고, 가지를 떠나는 잎들처럼 말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떠난 잎들은 나무의 발이 시릴까 멀리 가지 못하고 밑둥치에서 낙엽으로 맴돌고 있나이다. 사랑의 말씀들 발아래 수북하나이다. 김수상<시인>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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