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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특성상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다. 며칠 전 만난 모 남성은 내게 말했다. “여자 분이 힘드시겠다.”
이런 얘기는 수없이 들어서 그다지 특별하지도 기분 나쁘지도 않다. 다만 남자라서 힘들겠다는 말은 군대를 제외하고 사회적 업무에서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서울이나 부산, 혹은 저 미얀마나 캄보디아 사람을 만났을 때조차 정말이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대구 사람들만 유독 인사처럼 이 말을 한다. 속으로 대답한다. “대구 사람이라 힘들어요.”
영화 ‘82년생 김지영’. 최근 인기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영화 속 김지영은 베란다 햇살에 얼굴을 맡기며 자신의 현실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동료에게 말한다. “나 다시 일하고 싶어.” 이 장면은 나의 경험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이가 두 돌 될 무렵, 매일 아침 베란다에서 맞이하는 햇살보다 사람을 마주하고 그 등 뒤로 내려오는 햇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워본 여성이 일터에서 가지는 장점은 무엇일까. 내 경험을 말할까 한다. 직장에 면접을 볼 때였다. “몇 년 경력이 비어 있는데, 이때는 육아만 하신 거네요?”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네, 아이만 봤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예전엔 일만 했지만 지금은 아이를 키워 본 엄마로서 사람을 볼 줄 압니다. 지금 한 팀을 이끌 책임자를 구하신다고 알고 있는데, 팀을 이끈다는 건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를 키운 그 시간에 저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하고 사람을 포용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더 자신 있습니다.”
이런 명문장을 내가 말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말이다. 세상이 좋아진다는 건 앞에 있는 누군가가 산적한 문제들을 하나씩 치워주고 길을 만들어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2019년이 끝나가는 지금도 내게 “여자 분이 힘드시겠다”는 말로 다정함을 표현하려는 대구에서 나는 과연 쌓여있는 여성 문제들을 해결해왔나 물어본다.
미안하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대구는 성평등 지수에서 꽤 괜찮은 도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도를 통해 강제적으로 개선되었는지 모르지만 인식적이고 생활적인 면에서는 대학졸업 후 첫 직장 때와 별반 차도가 없다. 그래서 지금의 김지영들에게 “너희 앞에 언니가 있으니 걱정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어 부끄럽다. 산더미 같은 인식의 무덤을 다 부숴주겠다고 힘차게 장담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거리에서 혹은 어느 카페에서 스쳐갈 대구의 수많은 김지영들에게 영화 속에서 엄마 미숙이 하던 말을 해주고 싶다.
“지영아, 너 하고픈 거 다 해.”
서상희 (크레텍책임 홍보부장)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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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대구 김지영들에게](https://www.yeongnam.com/mnt/file/201911/20191101.01016074842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