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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극작가〉 |
한 사내가 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살을 섞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운명' 때문에. 부모는 그를 산에 버렸다. 하지만 사내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성장한 사내는 '세 갈래 길'에서 한 노인을 죽였다. 그리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해결하고, 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곳에서 한 여인과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라에 역병이 퍼졌다. 왕인 사내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방법을 찾았다. 바로 전왕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 추방하거나 처형하면 되었다. 왕은 그를 찾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살인자를 향한 칼은 결국 자신에게 향했다. 세 갈래 길에서 죽인 노인은 아버지였다. 왕이 되어 맞이한 아내는 어머니였다. '운명'을 거부하며 평생을 방랑했던 사내는 운명에 굴복했다. 아니, 사내는 굴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며 운명이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끝끝내 살고자 했기에.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의 개략적인 줄거리다. 그가 쓴 이 작품은 '서구 비극의 대명사' 혹은 '서구 문명의 원형'이라 불리며 오늘날에도 수없이 읽히고 공연되고 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각설하고, 필자가 '오이디푸스'의 삶을 운명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유는 유독 연초에 '사주'를 보러 다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사주는 그 기원이 중국 고대 왕조 '주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연약한 인간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궁금해했고, 한편으론 두려워했다는 뜻이 아닐까. 필자 역시 근방에 잘 본다는 곳은 꽤 다녔었다. 하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정해져 있는 무언가'가 정말 있는지는.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는 '의지'를 들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오이디푸스 왕'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는 누구보다도 참혹한 '운명' 속에 태어났다. 결말 역시 언뜻 보면 '운명'처럼 되었다. 하지만 찬찬히 희곡을 읽어보면 오이디푸스는 매 선택의 순간, 자신의 '자유의지'로 삶을 만들어냈다. 그 선택이 옳았든 옳지 않았든.
올해는 '사주' 대신 '운명'과 '의지'라는 물음에 물음을 주었던 희곡 '오이디푸스 왕'으로 1월도 중순을 넘어선 이맘때 다시 저마다의 '의지'를 다잡아보는 건 어떨까.
김민수 〈극작가〉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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