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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희 〈미술사학자〉 |
조선이 무너지고 일본에 나라가 빼앗길 순간, 전국에서 유독 대구에서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눈앞에 닥친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될 처지를 그냥 앉아 좌시하지 않았다. 이른바 국채보상운동(1907)이 그것이다.
일본이 떠안긴 국가의 빚을 갚자는 운동이다. 3·1독립만세운동보다 12년 전 일이다. 조선 말기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부터 일본은 우리 땅에다 자신들이 필요한 일들을 강압적으로 추진하면서 그에 소요된 모든 경비를 엄청난 빚으로 덮어씌웠다. 무력이 아닌 기술력과 금전적인 공세로 우리 땅을 속국화하려는 전략이었다. 철로와 도로 건설, 전기 및 항만시설 등 갖가지 사업을 강제로 추진하면서 1년 예산안이 넘는 국가 빚을 덮어씌운 것이다.
그런 풍전등화 같은 상황을 그냥 볼 수 없었던 대구 유지와 부민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기생이나 하층민은 물론 모두가 동참한 스토리는 지금 기록으로 보아도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구국적 일대 거사는 불길처럼 타올라 전국을 휩쓸었다. 이런 숭고한 구국운동이야말로 진정한 '대구혼'의 표출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 역사적인 국난극복 운동이 대구에서 발단된 원인이 있을 터인즉 왜일까?
대구에는 놀랍게도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민족주의자 양성기관이 있었으며, 수많은 독립운동이 특히 지역에서 연속으로 일어났다. 한마디로 대구다운 정체성의 발동이다. 조선시대 영남지방은 유학의 본고장, 선비들의 고장이었다.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 성주와 선산 등 경북 중서부, 경주·안강 등 경북 동부에 세거한 유림의 본향 모두가 대구를 중심으로 둘러싼 인근이다.
선비들은 한결같이 하늘의 이치를 따르며 이를 목숨처럼 받들었다. 확고한 학문적 신조이자 삶의 철칙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천리(天理)를 거역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단호히 궐기했다. 이것이 '영남, 대구정신'이다.
유학자들은 학문숭상이 첫째요, 시·서·화 3절이 문화였다. 조선말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접어들 무렵부터 이렇게 '학문과 예술'이 대구의 얼굴이 되었다.
즉 대구는 교육도시, 예술도시로 특징지어졌다. 지금도 대구에는 3만명 이상의 재학생을 둔 대학이 6개교가 몰려있다. 미술과 문학 등 예술이 탄탄한 지역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 대구의 뿌리이고 자랑이고 정체성이다.
이중희 〈미술사학자〉
이중희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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