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11007010000834

영남일보TV

[정문태의 제3의 눈] 주술, 정치 그리고 비극

2021-10-08

'손바닥 王' 정치판 주술 논란
印尼 수하르토·박정희 부녀…
비극으로 끝난 주술 종착지
정치는 혼령과 약속 아니라
오늘 이땅 시민과 약속 명심

[정문태의 제3의 눈] 주술, 정치 그리고 비극
국제분쟁 전문기자

서울에서 날아드는 정치판 뉴스가 갈수록 가관이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자가 손바닥에 '왕'을 새기고 나타나서 동네 할머니들이 그려주었다고 하질 않나, 누구는 붉은 속옷 입는다고 서로 욕질을 해대질 않나. 시민사회를 아주 얕잡아 본 정신 나간 짓들, 그것도 아주 질 낮은 핑계를 끌어다 붙이며.

타이 왕실과 군부를 지지하는 옐로셔츠(친왕정파)가 적의 공격을 막아준다며 19세기 국왕 동상에 여성 생리혈을 바르던 장면이 떠올라 낯이 화끈거린다. 2006년 타이 육군총장 손티 분야랏끌린이 쿠데타로 탁신 친나왓 정부를 뒤엎자마자 벌어진 일로 한동안 외신판의 큰 비웃음거리였다.

방콕의 그 생리혈과 서울의 손바닥 왕은 본질에서 다를 바 없다. 이성과 논리와 지식과 상식을 버무려 합리적이고 합법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할 공적 정치 공간을 주술에 기댄 사유화로 농락했으니.

참 질린다. 30년 넘도록 외신에서 일하며 이런 삿된 주술정치를 수없이 봐왔으나 도무지 내성도 생기지 않는 게! 시민 상식을 짓밟는 정치와 주술의 협잡은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어느 한 나라의 현상만도 아니다. 예컨대 타이에서는 한 가닥 하는 정치인이나 군인이라면 모조리 주술사를 끼고 돌았다. 의회 개원, 장관 취임, 쿠데타 날짜까지 주술사가 점지했고, 하물며 정책을 놓고도 총리나 장관이란 자들이 툭하면 점쟁이한테 자문을 구했다. 마찬가지로 버마의 독재자 네윈은 1987년 주술사가 가리킨 숫자 '9'에 미쳐 45짯(4+5=9)과 90짯 지폐를 발행하는 기상천외한 짓까지 했다. 현대화의 상징이라는 싱가포르에서도 1980년대 지하철 건설 사고가 나자 불행을 막겠다며 총리 리콴유가 주술사 뜻을 받들어 1달러짜리 동전에 8괘를 새겼듯이.

고상하게 말할 것도 없다. 주술정치는 얼빠진 돈놀이고 권력놀음이다. 앞서 보았듯이 타이나 버마 같은 나라는 불교 사회다. 더구나 불교는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실에선 사찰과 승려를 끼고 정치인이 나팔수 노릇하는 거대한 부적 시장판이 벌어져왔다. 이건 전통적인 정령신앙을 파고든 현대적 종교시장으로 볼만하다. 이성을 마비시킨 표가 돌고 돈줄이 흘러넘치는 흥정판, 다른 말로 이 주술의 세계는 정치인들이 빨대를 꽂아온 원천이었다. 1980년대 동남아시아에 경제개발 바람이 불고부터 주술정치가 덩달아 날뛰게 된 사실을 눈여겨 볼만하다.

고금동서를 통틀어 유독 독재자 언저리에 주술가나 무속인이 들끓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법과 제도를 바탕 삼은 민주주의 원칙을 깨트린 자들이 기댈 구석은 오로지 초현실 세계의 행운뿐이었을 테니. 보라. 점성술사를 끼고 정책을 결정했던 인도네시아 독재자 수하르토가 그랬고, 유신 선포를 점쟁이와 머리 맞댄 박정희가 그랬고, 대물려 사술에 놀아났던 그의 딸 박근혜가 그랬고, 1987년 대통령 선거일을 무속인과 상의한 전두환이 그랬듯이. 주술과 밀교를 바탕 삼은 신비주의를 들이댄 히틀러는 그 선배뻘이었고.

단, 이들 모두는 시민의 역사에서 버림받고 비극으로 끝났다. 주술의 종착지는 그렇게 비정했다. 손바닥에 왕을 새기든 붉은 속옷을 입든 저마다 역사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까닭이다. 정치는 혼령이 노니는 천국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주고받는 시민과 약속이다. 그 약속은 이성적인 민주주의다. 주술 따위로 시민사회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뜻이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