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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명재<시인> |
"아이고 내가 빨리 죽어야 너희가 편한데." 할머니는 꼭 이런 말을 덧붙이면서 거실 바닥에 보자기를 펼치곤 했다. 곶감, 배, 복숭아, 김치, 한과, 옥수수. 어떤 것을 보내든 할머니는 꽉꽉 채웠다. 나는 그 옆에 나란히 붙어 앉아서 할머니 손등에 비치는 연한 핏줄이라든가 잔잔한 근육들을 지켜보았다. 부드럽게 보자기 끝이 스치는 소리. 거실로 들이치는 맑고 옅은 빛. 천천히 내쉬는 노인 특유의 숨소리. 사랑은 뭘까.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분명 사랑 곁에 있었다.
그러니까 '사랑의 정의'는 쉽게 내릴 수 없지만, '사랑의 실천'은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것. 이를테면 하루빨리 자신이 죽어야 가족들이 편할 거라고 투덜대지만, 자세히 보면 할머니는 누구보다 보자기 매듭을 단단하고 정하게 묶었다. 사실 얼마나 정갈하게 매듭을 묶었는지, 나는 할머니가 묶은 리본을 보며 탄복하고는 했다. 옥색, 주황, 금빛, 파랑, 쑥색, 연보라. 보자기 색깔은 또 얼마나 품위 있었는지. 예쁜 보자기를 장롱 속에 쟁여두었다. 물복숭아의 바깥 부분은 나부터 줬다. 콩나물을 무칠 때는 살살 손가락 끝으로. 그 모든 게 사랑의 행위였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젠 그 모든 세부를 떠올리는 것이다. 받는 이를 생각하는 노인의 손끝. 작은 것 하나 허투루 다루지 않고, 꼼꼼하게 만지고 묶던 시절이었다.
"절기는 오월 단오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중략) 이날은 편지 보낼 때 보라색 종이에 백단향 꽃을 싸서 보내거나, 푸른 종이에 창포 잎을 가늘게 말아 묶어서 보내거나, 아니면 흰 종이를 창포의 하얀 뿌리로 묶어서 보내는 것이 풍류 있다. 누구 한 사람이 긴 창포 뿌리를 편지 속에 넣어 같이 보내려고 싸고 있으면 옆에서 지켜보는 여방들도 덩달아 마음이 설렌다." (세이쇼나곤, '베갯머리 서책' 중에서)
일본 헤이안시대의 뇨보(女房)였던 세이쇼나곤은 자신이 모시던 중궁을 잃어버린 뒤,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이렇게 글로 그린다. 단오에는 보라색 종이에 백단향 꽃을 싸거나, 푸른 종이에 창포 잎을 가늘게 말아 묶거나, 긴 창포 뿌리를 편지에 동봉하는 것. 이 모든 형식과 절차 속엔 사랑이 있다. 손끝이 하얘지도록 세심(細心)해지는 것.
내가 정말 좋아하는 한 친구는 어느 영화를 보고 영화 속 주인공의 행동을 따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기 직전에, 아주 향기로운 비누로 손을 씻는 것. 그렇게 정갈해진 두 손으로 책을 펼친다. 흰 손으로 편지지를 꺼내 연필을 쥔다. 비누 향이 충분히 종이에 스며들도록. 그렇게 오랫동안 뜸 들이면서, 친구는 용감하게 사랑을 해낸다.
고명재<시인>
고명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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