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다운됐다고 끝이 아냐
일어나라고 10초 카운트
니가 너무 고되고 힘들면
엎어진 자리서 누워있어라
숨 돌아오면 다시 싸우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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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
금메달을 따고도 불행한 시절을 보내야 했던 복서가 있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라이트미들급 결승전에서 미국 선수를 판정승으로 이겼지만, 편파판정 논란에 휩싸여 스물네 살의 나이에 은퇴하고 만다. 언론은 그를 나라를 망신시킨 죄인으로 몰아갔고, 대중들도 그 장단에 맞춰 손가락질을 해댔다.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면 떳떳하게 복싱을 계속할 수 있었을 텐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심이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는 이유로 이 젊은 국가대표 복서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9년 후, IOC는 이 경기에 승부 조작은 없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카운트'(감독 권혁재)는 바로 그 비운의 주인공, 박시헌 선수를 모델로 한 영화다.
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조용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시헌'(진선규)은 어느 날,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승부 조작의 피해자가 된 '윤우'(성유빈)를 발견하고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시헌은 그때부터 윤우와 몇몇 학생들을 데리고 복싱부를 만들어 전국대회를 목표로 피나는 훈련에 돌입한다. 시헌을 향한 대한복싱협회의 따가운 눈초리와 견제, 편파 판정에도 불구하고 시헌과 복싱부 아이들은 서로를 보듬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몇몇 억지스러운 장면들과 평면적인 캐릭터, 소박한 연출 때문인지 박스오피스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미덕도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에는 한 실존 인물의 불행했던 과거를 조명하면서 억울함을 씻어주려는 휴머니즘, 과거 복싱계에서 공공연히 자행되었던 승부 조작에 대한 비판이 깔려있고, 무엇보다 복싱이라는 스포츠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진다. 진해의 흐드러진 벚꽃 풍경과 본래 이 지역 출신인 배우 진선규(박시헌 역)의 구수한 사투리는 유쾌한 덤이다. 특히 경기 신들의 연출에서 돋보이는 복싱에 대한 진정성은 '카운트'를 스포츠인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스포츠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고 보면, 복싱만큼 비인기종목이면서 영화의 소재로 자주 다뤄지는 스포츠도 없는 것 같다. 물론 외국에서는 지금도 인기가 있기 때문에 저 유명한 '록키'(1976) 시리즈가 '크리드'(2015)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 '신데렐라 맨'(2005) 같은 명작도 나오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지상파TV에서 복싱 중계를 볼 수 없게 된 지 꽤 오래된 한국에도 복싱 영화의 계보가 있으니, 곽경택('챔피언'), 류승완('주먹이 운다'), 강우석('전설의 주먹') 등 흥행 감독들의 영화부터 독립영화까지 고루 포함되어 있다. 복싱이 이처럼 영화감독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사각형의 링 위에서 삶의 풍파라는 상대와 외로운 사투를 벌여야 하는 복싱 경기가 인생 역정과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는 혼자 3분 3회전의 시간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코치의 인도 그리고 동료들의 응원과 함께 가고 있다. '카운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끝으로,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자 복싱의 매력을 최고로 부각하는 대사 하나를 소개한다. 복싱 경기를 치르는 것마냥 치열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대사다.
"복싱이라는 게, 다운됐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이다. 다시 일나라고 카운트를 10초씩이나 주거든. 니가 너무 고되고 힘들면 엎어진 자리에서 그대로 누있어라. 그라고 니 숨이 다시 돌아오거든 그때 다시 일나가 딛고 싸우면 된다."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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