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산청·함양서 발생한
1951년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공원·현장 방문후 충격
역사의 법정에 세워서라도
억울한 죽음 되풀이 막아야
![]() |
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
72년 전인 1951년 3월29일, 피난 수도 부산에서 열린 제2대 국회 54차 본회의에서 경남 거창 출신 신중목 의원이 발언대에 섰어요. 그는 2월9~11일에 걸쳐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에 의해 거창군 신원면 주민 719명이 학살당한 사건을 폭로했습니다. 이에 국회는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현지에 파견하기로 의결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공비 187명을 군법회의 판결에 의해 총살했다'고 담화문을 발표했어요. 신성모 국방장관도 '양민학살이 아닌 공비토벌'이었다고 국회에서 답변했습니다. 계엄 민사부장 김종원은 신성모의 지시로 사건 현장 부근에 '공비'로 위장한 병력을 배치하여 국회 진상조사단에게 총격을 가했지요. 의원들은 현장 조사를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진상이 드러나 관련자들은 대구고등군법회의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어요. 연대장 오익경은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은 징역 10년 그리고 조사를 방해한 김종원은 징역 3년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작전을 지시했던 11사단장 최덕신은 보직 해임에 그쳤으며, 5·16 군사쿠데타 이후 외무장관 등 요직을 역임했어요. 말년에는 월북하여 좋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범죄자들은 곧 특별사면으로 나와 다시 군에 복귀했고, 오히려 출세가도를 달렸어요. 특히 김종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치안국장까지 지냈고, 한동석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 강릉과 원주시장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지 거창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월7일부터 닷새에 걸친 3대대의 민간인 학살은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거창군 신원면에서 차례로 이루어졌어요. 그 가운데 산청과 함양의 7백여 명 학살은 잘려 나가고, 거창만 세상에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거창-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인 것이지요.
당시 3대대는 공비와 내통하는 '통비분자'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작전을 수행했다지만, 사실은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것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산청, 함양 주민의 경우 총 705명 중 10세 미만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가 6백여 명에 달했어요. 719명이 학살된 거창군 신원면도 14세 미만 어린이가 359명, 60세 이상 노인이 59명으로 75%나 됩니다.
유족들의 피맺힌 한은 4·19혁명 이후 분출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유족대표들을 구속했으며, 합동묘는 파헤쳤고 위령비는 묻어 버렸습니다. 학살 사실을 공식화하지 못하게 하여 집단기억의 형성을 막으려는 정치적 의도였어요. 그 후에도 유족들은 계속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군에 대한 신뢰도 하락 등을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다시 활발해진 유족들의 치열한 인정투쟁으로, 1989년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지냈으며 파묻혔던 위령비를 다시 일으켜 세웠어요. 마침내 1996년 국회에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었고, 2004년에는 거창과 산청에 추모공원이 각각 준공되었습니다.
지난 2월 말 거창군 신원면의 학살 현장과 추모 공원을 방문했을 때 많은 충격을 받았어요. 연대장이나 대대장이라 하지만, 겨우 20대 청년이었던 그들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궁금했습니다. 만일 사법적 처벌이 시효만료로 어렵다면, 그들을 역사의 법정에라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억울한 죽임을 당했던 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