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애 전 대구가톨릭대 재경동창회장은 '우보천리' '십시일반'의 삶을 강조했다. 소의 걸음으로 천리를 가는 것처럼 묵묵히 일하고, 여럿이 힘을 보태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보다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고 제안했다. 〈대구가톨릭대 제공〉 |
새벽같이 집을 나서 일터로 향한 아버지는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그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던 딸은 단숨에 현관까지 뛰쳐나갔다. "아이고, 우리 큰딸이네." 아버지는 반색하며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까슬한 볼을 장난스럽게 얼굴에 부볐다. 꺄르르~ 꺄르르~. 아이의 웃음소리가 밤하늘로 퍼져 나갔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그 딸은 나이 일흔, 고희(古稀)가 됐다. 김성애(약사) 전 대구가톨릭대 재경동창회장은 "그 겨울밤 서늘하면서도 따뜻했던 아버지의 품이 지금도 못내 그립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부전여전 나눔의 삶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부친 이어
올해 대구가톨릭대에 30억원 쾌척
"친정서 받은 유산 거의 전액 기부
학생들 성장이 나라의 경쟁력 될 것"
한국학 발전기금도 수십년째 후원
김 전 회장이 서울 한국콜마 종합기술원 도서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은경기자 |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김 전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아버지 김학봉 전 한영요업 대표다. 아버지는 매사에 꼼꼼하고 엄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6·25전쟁 후 재건 바람을 타고 사업을 확장했다. 특히 미군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어 1950년대에 중고 지프차를 두 대나 구입했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평생 단정하고 정갈한 분이셨어요. 딸인 저에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죠. 명절에 자식들이 인사를 가더라도 반드시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보료에 앉아서 절을 받았던 분이에요."
2014년 별세한 아버지는 남다른 나눔철학을 실천해 주목받기도 했다. 생전에 50억원의 사재를 출연해 우송복지재단을 만들고 장애인, 스포츠인을 돕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실천했다. 김 전 회장은 "아버지가 복지재단을 설립했을 때 모두들 놀라워했지만 저는 당신이 평생 어려운 이들을 챙기고 도왔던 것을 알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어요. '나 혼자 잘나서 된 게 아니다'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당신이 이룬 모든 것을 기꺼이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 나고 보니 여자이더라
김 전 회장은 1남3녀의 집에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 아래로는 여동생 둘을 두었다. 식구들 모두가 꽤 명성이 있는 집안이다. 오빠 김대곤 회장은 대구은행 본점(대구 수성구) 건너편 한영아트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또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김종복 화가는 고모다.
김 전 회장도 어려서부터 반장, 전교 부회장 등을 도맡으면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명문으로 불리는 삼덕초등, 사대부중, 경북여고를 거쳐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약대를 나왔다. 이화여대, 숙명여대와 함께 최고의 명문 여대로 손꼽힌 효성여대는 엄격하고 철저한 학사관리로 유명했다. 교복을 착용한 것은 물론 미팅을 하다 발각되면 시말서를 썼다. 엄격한 학내 규율로 고생도 했지만 대학 4년은 그녀 인생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졸업 후에는 곧바로 동산병원 약제부에 취직했다. 김 전 회장은 "약대 입학 후 무의촌 의료봉사를 하고, 방학 때면 전국을 돌아다니며 약초 채집을 했다. 졸업 후 동산의료원 약제부에서 근무하며 항생제, 효소제 등 병원에 필요한 약제를 조제하는 일은 내게 큰 보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남편과 일군 한국콜마
윤 회장 중요결정 때마다 의견 구해
제약 분야로 사업영역 확장할 때도
약학 전공 노하우 바탕 든든한 지원
"셋째 가던 대구 지금은 많이 밀린듯
지역 위해 뭔가 해야겠단 생각 들어"
◆남편과 키운 '한국콜마'
김 전 회장의 남편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은 재계에서 아내를 잘 챙기는 CEO로 유명하다. 취미활동은 물론 재계의 행사, 단체장 활동 등 가는 곳마다 아내를 동반한다. 당연히 업무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아내의 의견을 우선 청취한다. 1990년 한국콜마를 설립하고 훗날 제약 분야로 업무영역을 확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콜마는 업계 최초로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을 채택해 운영된다. 보통 화장품 제조업체는 주문자 납품방식(OEM)으로 생산하지만 한국콜마는 독자적인 제품 연구개발부터 디자인, 생산까지 도맡아 하는 시스템을 선도적으로 구축했다.
한국콜마는 설립 첫해부터 흑자를 내더니 매년 흑자 폭을 늘려가며 빠르게 성장했다. 직원의 30% 이상을 연구원으로 구성하고, 연 매출의 5% 이상을 신소재와 신기술 연구에 투자한다. 화장품으로 출발해 제약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면서 회사는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회사의 성장 뒤편에는 약학을 전공하고, 동산병원 약제부에 근무했던 김 전 회장의 노하우가 십분 발휘된 것은 당연하다.
◆대구가톨릭대에 30억원
김 전 회장이 미국 예일대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강당 한쪽 벽면에 가득한 이름을 보고 궁금해서 물었는데, 대학을 위해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라는 답을 들었다. 학교 발전을 위한 기부자들의 소중한 뜻을 기리는 의미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 순간 김 전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대학 발전을 위해 기부를 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겨 그 뜻을 기리고 있는 예일대학의 예우도 놀라웠다.
그로 인한 영향이었을까. 김 전 회장은 올해 모교인 대구가톨릭대에 30억원의 발전기금을 기부했다. 대가대 단일 기부금 중 역대 최고액이다. 기부금은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교내 역사 박물관 사업에 전액 사용된다. 박물관 명칭은 기부자 예우에 따라 DCU 김성애 역사박물관으로 바뀐다. 김 전 회장은 "친정에서 받은 유산이 좀 있다. 남편과 상의해서 거의 전액을 기부했다. 내 기부가 학생들이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다면 이것이 훗날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십시일반' 나눔 철학
"제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대구는 전국에서 둘째, 셋째 가는 큰 도시였는데, 지금은 너무나 밀려버린 듯해요. 그 책임이 대구 출신들한테도 많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겁고, 한편으로는 대구를 위해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김 전 회장은 대구가 코로나 확산의 근원지로 지목되던 때 적극적인 모금활동에 나서 눈길을 끌었다. 경북여고 재경동창회 박재옥 회장, 이수곤·김숙애 부회장 그리고 한규행 장학회 이사 등 후배들과 모금에 들어가 일주일 만에 7천만원을 모아 기부했다. 이뿐 아니다. 남편과 함께 한국학 발전기금, 서울대 우송한국학 사업 등에 수십 년째 지속적인 지원을 해오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우리말에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말이 있다. 여럿이 힘을 보태면 한 사람쯤 도와주기 쉽다는 말인데, 조상들은 벌써 오랜 옛날부터 그렇게 지혜롭게 나눔을 실천했던 것이다. 작지만 여럿이 함께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덧붙였다. 김 전 회장은 "한국은 굴곡진 근현대사를 겪었지만 타고난 근성과 노력으로 기적적으로 50년 만에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넘어 다른 사람과 공생하고, 더불어 나아갈 수 있도록 선진국 마인드로 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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