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건재한 한자…사용 줄일 게 아니라 활용하는 법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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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엽 (한자연구가) |
한자는 언제까지 살아남을까? 겉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한자는 이미 무대를 내려온 상태다. 한자를 섞어 쓴 읽을거리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직접 한자를 쓰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이쯤 되면 적어도 한국에서는 한자가 사라졌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자를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자를 많이 아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제 한글만으로 충분하다는 목소리를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한자여 안녕!'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한자는 우리의 문자만은 아니다. 루쉰이 한자가 멸하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말한 지 한 세기를 넘었으나, 지금 중국에서 한자는 그대로 유효하다. 간체자를 많이 만들었으나 그것 역시 또 하나의 한자일 뿐이다. 일본도 신자체를 도입하였으나, 한자는 여전히 건재하다. 이 시점에서 볼 때 중국과 일본이 한자를 버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루쉰과 같은 한자 망국론은 어느 곳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한자를 지난 시대의 유물로 치부하고 뽐내는 기색이 가득한 곳은 오직 한국뿐이 아닐까?
우리가 쓰던 한자는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신문과 공문서와 책에서 미련없이 한자를 버렸다. 한자로 쓰인 수많은 책은 아마도 도서관 수장고에서도 치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자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승리감에 취해 있는 지금도 그것은 국어사전에 범접하지 못할 자세로 똬리를 틀고 있다. 국어사전에서 한자를 모두 털어내지 않는 한 한국어는 한자에서 해방되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한글전용을 주장하고 한자 교육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루빨리 국어사전을 한자의 구속에서 해방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한자는 영원토록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열혈 운동가들은 어디에서 무엇 하는가,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는데.
한자를 혐오하는 많은 사람의 기대와는 반대로, 고도로 발달한 컴퓨터시스템은 역설적으로 이 표의문자를 옭아매고 있던 족쇄를 풀어주고 있다. 문자를 종이에 한 장 한 장 인쇄하던 시대에는 한글과 로마자처럼 입력 속도가 빠른 음소문자가 편리하였으나 인터넷, AI 시대에 들어서며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빠른 입력이 더는 우수한 문자를 가리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파일 속에 축적된 문자 정보는 한글이나 한자를 차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우리말을 버리고 전혀 다른 언어로 읽고 쓰는 방법 외에는 없다. 우리말을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한자는 여전히 우리말의 DNA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 한자를 없애지 못하고, 우리말에서 한자 DNA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일은 분명하다. 중국과 일본이 한자를 버리지 않듯 우리도 그 문자의 효용을 살려 최대한 활용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한자가 어렵다는 말은 사실일 수도 있겠으나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백 번을 양보하여 그것이 어렵다고 하여도 효용이 크다면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이 맞는다. 다행히도 우리는 우리말에 맞춤 제작한 한글이 있으므로 배워야 할 한자의 수가 중국과 일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제 다시 '한자여 안녕!'이란 인사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별이 아니라 다시 만남을 반가워하는 인사다. 한자의 미래는 오직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을 것이다.
한자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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