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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
우리는 때로 하찮은 것에 목숨을 걸 때가 있다. 참기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외출에서 돌아오니 현관문 앞에 참기름이 두 병 놓여 있다. 메모 한 장 없지만 나는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L여사다. 그녀는 툭하면 나에게 참기름을 선물한다. 최초의 선물은 출판기념회에서였다. 이런저런 선물과 봉투 속에 참기름이 두 병 끼어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서 며칠 후 점심을 샀더니 '국산 참깨, 국산 참기름'을 누누이 강조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넘겼다. 돌아가신 친정 엄마가 생각났다.
친정 엄마는 참기름을 두고 유난을 떨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고향까지 내려가 국산 참깨를 일부러 구입하여 단골 방앗간에서 기름을 짰다. 반드시 단골 방앗간에서 짰다.
참기름은 국산이 중국산보다 고소하고 값이 나가기 때문에 일반 방앗간에서는 은근 슬쩍 바꿔치기를 한다고 했다. 처음부터 국산깨를 중국산 깨와 섞어 버리거나, 기름을 짜고 난 후 국산 참기름을 중국산 참기름과 바꿔치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더러는 참깨 품질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참기름의 양을 속이기도 하므로 기름을 짤 때는 방앗간에서 직접 지켜보아야 한다고도 했다.
친정 엄마는 그렇게 유난을 떨어 짠 참기름을 며느리와 딸들에게 두 병씩 나누어 주었다. 줄 때는 L여사처럼 '국산 참깨, 국산 참기름'을 강조했다. 자식들은 무덤덤하게 참기름을 받아갔다.
문제는 엄마가 편찮게 되고부터였다. 엄마는 더 이상 바깥 출입이 어려웠다. 그런데도 국산 참기름은 포기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명절 무렵 친정에 갔더니 엄마가 아버지에게 참깨 보따리를 들이밀며 다짐을 하고 있었다.
"꼼짝 말고 참기름이 다 나올 때까지 지켜보고 있으소!"
옆에 있던 내가 깨 보따리를 거칠게 낚아챘다.
"엄마 이제 이거 하지 마. 중국산도 너무 맛있고 좋아. 다들 그렇게 살아."
"명절 나물도 볶아야 하는데."
"엄마 자꾸 이러면 나물도 때려치울 거야."
그날로 엄마의 참기름 짜는 일은 중단되었다. 대신 나에게는 L여사가 나타났다. 그녀도 친정 엄마 못지않게 '진짜 국산 참기름'을 주장한다. 오죽하면 출판기념회에까지 참기름을 들고 오겠는가? 엄마, 아버지 다 돌아가시고, 이제 내게는 L여사의 참기름만 남아 있다. 추석 무렵이라 갓 짠 기름을 문앞에 놓아둔 모양이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참기름 본 김에 모처럼 무나물이나 다글다글 볶아볼까나.
현관 앞에 수줍게 놓여 있는 참기름 두 병을 거두어 들이니 온 집에 고소한 냄새가 번진다.
박기옥<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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