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아<시인·경영학 박사> |
가을이다. 무척 짧아진 이것은 곧 떠나갈 모양이어서 사람들이 '갈'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갈'이 갑작스레 이사 온 듯 어수선하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나, 차 한 잔과 낙엽, 그리고 별빛 아래의 꿈은 꼭 이 계절이어야만 한다. 잔잔히 별을 세는 일도 오롯이 가을이어야만 한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아스라한 얼굴들을 떠올리게 하고, 어딘가에서 같은 소리를 내고 있을 그들을 기어이 찾아내곤 웃음 짓게 한다. 흐뭇한 계절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기를 안부 전하고, 느즈막이나마 "곁에 있어 늘 고맙다"는 마음 한편을 덧붙여본다.
오후에는 따뜻한 호박죽을 먹었으면 좋겠다. 뭉근하게 끓인 호박죽 위에 계핏가루를 살짝 뿌리면 매콤한 기운 여럿이서 폴폴 입안을 날아다니겠지. 풀 향이 은은한 홍시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제대로 줄여 갈 것이고, 디저트로 달달한 콤포트에 맑은 홍차를 곁들이면 스산한 계절이 금세 잦아들 것이다. 차 한 잔으로 오후는 그만 느긋해질 것이 뻔하다.
그러다 보면 되물리고 싶은 생각에 잠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요란스레 지울 것이 많다는 뜻은 아니다. 모자라 허덕이던 시간들을 예사롭게 넘기지 말자는 것이다. 크게 웃지 않아도 되는 이 소박한 순간이야말로 어쩌면 이 계절에 가장 어울리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책을 넘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침묵 속에서 이야기는 늘어지고 혹여 사색에 잠긴다 하더라도 그리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페이지마다 배어 있는 시간의 결이 언제나 그렇게 물들이고 채워나갈 것이므로.
계절의 말미에는 잊히지 않는 무언가가 또 서러워서 편지를 쓸 것이다. "왜 편지를 쓰세요?" "그리워서란다. 나뭇잎이 지고 나면 잊고 지내던 얼굴들이 아득해지지. 잊지 않으려고 쓰는 거야. 그래야 외로움이 더 커지지 않거든." 훗날, 아이들과 필자는 영화 속 장면처럼, 제법 근사한 목소리로 질문하며 답하며 서로를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편지에는 모든 것에 대한 위로와 사랑이 담겨 있으면 좋겠다. 거리를 넘어 따스한 온기가 넘실거리면 좋겠다. 쓰다 만 편지는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지도 못한 채, 여전히 시린 가을볕처럼 아이들 곁에 머물러 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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