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처럼 뚜렷한 그녀 모습
거리에서 시작된 사랑의 순간
문학과 현실의 충돌로 갈등
피상과 본질을 향한 대화
재미없던 사랑의 쓸쓸한 끝
우광훈 소설가 |
1989년 봄.(아주 오래전 일이죠) 난 팥빙수처럼 흑백이 뚜렷한 여자를 사귀고 있었다. 그 당시 그녀는 영남대 총학생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꽤 진보적이었나 보군, 하고 여러분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세상 모든 부조리를 자신의 어깨에 다 짊어지고 있진 않았다. 그렇게 난 그녀의 표정과 몸짓 그 어디에도 위선이란 두 음절의 단어를 발견할 수 없었다. 아니, 아픈 건 오히려 나였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오해로 가득했던 나에게,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일정한 거리예요'라고 나지막이 읊조리곤 했다.
우린 주로 동성로에 있는 고전음악감상실인 '하이마트'에서 만나 브람스를 들으며 사랑을 나누었다. 거리엔 최루탄과 화염병의 잔해들로 가득해 안전한 곳이라곤 그곳 밖에 없었으니까. 그 당시 난 소설 창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나 자신이 무척 초라해 보이던 시절이었다. 난 항상 이렇게 말했다. 동화처럼 글을 쓰고 싶다고. 그러자 그녀는 '그건 성숙한 자기표현 방법은 아닌 것 같군요. 현명하지도 않고요. 그래요. 일기처럼 글을 쓰세요'라고 말했다.
그녀와 만난 지 백 일째 되던 날, 난 나의 첫 단편소설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솔직히 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향한 나의 연정을 담은 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나의 원고를 건성으로 넘겨대더니 더없이 나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건 엉터리예요. 혁명과 진보를 위해 거리에서 젊음을 불사르는 학생들이 이런 유약한 문장 따위를 즐길 만한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솔직히 당신의 언어에서 남용되는 은유는 성경보다 더 피상적이에요'라고. 그때, 난 처음으로 그녀의 말속에서 눈 내리는 겨울호수 위를 떠다니는 백조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완벽하리만큼 자신의 색채를 감춘 그런 하얀 색 말이야. 난 결국 이렇게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난 나 자신의 삶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그런 얼빠진 개인주의자는 아냐. 나도 너처럼 우리가 느끼는 모든 부조리를 불쾌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생각, 딱 그 정도일 뿐이야.' 그래, 그 당시 내 작품이 다소 감상적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 삶 자체가 피상적인 이해와 형식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녀는 잠시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좀 예민했죠. 오늘 동성로에서 대규모 가투가 있었거든요. 함께한 친구 중 몇몇은 심하게 다쳐 응급실로 실려가 버렸고요. 그래요. 상처 난 얼굴이 담긴 사진과 실제로 상처 난 얼굴을 대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동일하리라 생각진 않아요. 저도 처음엔 그랬거든요. 하지만 전 거리에서 그 둘의 차이를 깨달았죠. 어떤 대상을 정확히 해석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시선과 능동적인 참여라고 생각해요. 피상과 본질의 차이는 실존에 가까운, 즉 진리와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불굴의 의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전면적이며 일상적이에요. 제가 말하는 일기와 당신이 말하는 동화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난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 재미없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빙긋이 웃으면서 '당신은 재미는 없지만 날 생각하게 해요'라고 답했다. 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난 너에게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알다시피 여자란 남자가 재미없으면 언젠가는 떠나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의 세 번째, 그 차디찬 여자와의 사랑은 끝이 났다. 우광훈 소설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